저수지의 개들-시체가 일어나 총을 쏘리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파산
- 이 영화는 가장 위대한 뒷북일 수 있다는 게 나의 자그마한 결론이다 19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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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개들]에 대해서는 너무 찬사가 많았다. 이 글은 돈이나 좀 벌어볼까 하고 키노지에
응모했던 평을 좀 수정한 것이다. 분량제한이 없어졌으니 왕창 길게 늘여볼까나?
사실 이 평을 처음 쓸 당시에는 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참 재밌다! 누가 모르나? 나와 내 동생은 '우리의 양아치' 스티브 부셰미한테 반해버렸다! 그러시든지요. 이런 말들을 듣지 않으려면 그 재밌는 내용을, 또 미스터 핑크나 미스터 블론드한테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좀 풀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양아치에 대한 매력, 혹은 백수에 대한 매력과 동경에 대해서는 심히 현학적이기는 하지만 키노 비평공모에서 가작으로 뽑힌 김지훈의 글도 어느정도는 근접했다고 본다. 단지 난 영화양식의 측면에서 계층분석을 해들어가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그냥 명쾌하게 '백수파워'의 형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편이 쉽다.
백수파워란? 의식적으로 '역사를 지고나갈 백수!' 어쩌구 떠들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현재 세계의 변혁을 주도하는, 그것의 자양분이 되는, 산업 측면에서 말하더래도 가치창출의 저수지인,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않으면서 나름의 삶을 개척하는 도시인들을 말한다. 그 도시인들은 과거의 룸펜 혹은 놈팽이들과는 성격이 다르고, 법을 '몸으로 부정하는' 범죄인들과도 또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백수파워'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후기산업사회의 노동자 혹은 제3의 물결의 코그니타리아와 같은 계급분석의 버릇은 버려야 한다. 즉 그들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치 혹은 부에 기초하여 그들의 성격을 규정지으려 하면 옆길로 새어나가기가 십상이란 말이다. 왜냐면 그들은 그들이 노동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고, 즐겁게 인생을 사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재사회, 흔히들 포스트모던사회라고도 부르는 이 기기묘묘한 세상의 미덕이다.
그들은 부르조아가 아니다. 별로 잘 사는 계층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없다. 물론 잘 나가는 프리랜서의 경우는 부르조아 이상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이 타인의 노동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가능한 것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으며, 둘째 탈영토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재영토화의 전략을 구사하는 패거리도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자본의 입장에서 파악하자면 백수는 노동생산력 시장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직접생산의 밖을 떠돌고 있는 예비노동력이고, 열악한 노동조건의 노동자에 대한 위협기능까지 해주는 여분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벌써 확인하고 있는 것은 이 '노동하지 않는' 백수들을 위해 전용 TV가 나왔다는 것이다. 24시간 방송하는 케이블TV야말로 백수를 위한 TV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주부들을 위한 TV라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 직접생산자들이 아닌 계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케이블TV의 기본성격은 변함이 없다.
(주) 주부, 어린이, 학생, 백수 등의 직접적 사회적 생산(즉 돈을 벌어오는 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생산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돈 벌어오는 노동자들을 잘 보살핌으로써, 스스로를 양질의 노동력으로 만듬으로써, 문화수용자의 역할을 잘 해냄으로써 등등) '간접' 노동자들을 '비임금 노동자'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구분은 단지 기본적인 것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과 분리되어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만을 팔 수 있는 과거의 '프롤테타리아' 개념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현재의 노동자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의력과 새로운 사이버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등의 중요한 가치창출의 조건들은 이미 노동자가 자신 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산수단을 가진 노동자들'을 '사회화된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개념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전복의 전치학]에 보면 잘 나와있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백수파워는 이미 사회화된 노동자의 개념틀을 넘어버렸다는 생각이다. 인류는 '도구를 이용한 노동'을 벗어나 '도구-환경의 알아서 일처리' -인간 입장으로 뒤집어 보면 '완전히 놀기' 시스템으로 가는 강력한 조류 속에 있는 것이다. )
백수파워는 새로운 시대의 노동자유형이다. 즉 '일하지 않는' 가치창출자이다.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시뮬레이션 시대의 무궁무진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은 다름아닌 아르바이트나 실직자수당으로 꾸려가면서 창의성을 발전시켜나간 아티스트들이다. 창조자로서도 수용층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백수파워다. 내가 굳이 프리랜서를 백수파워에서 제외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직접노동과 사회적 관계를 통한 간접생산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백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즉 전통적 백수 유형이 강력하게 남아있단 얘기다.) 백수는 나날이 땀흘려 일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으며, 당연히 일확천금에 눈독들인다. 현실적으로 실업수당을 타든 우리나라 같으면 부모에게 돈을 타쓰든, 아르바이트를 하든간에 유지비만이 있을 뿐이니 미래의 사업을 위한 투자자금은 우연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을 품은 범죄자들과의 공감이 쉽게 이루어진다. (뭐 일 열심히하는 사람도 그렇겠지만은) [저수지의 개들]의 대표적인 양아치스타일 스티브 부세미가 갖는 매력은 이에 기초한다. [20달러의 유혹 20 Bucks]에서 보여준 순도 120%의 양아치 연기 외에도 여러 영화에서 그는 양아치스러운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했는데, [...개들] 역시 적확했다. 약삭빠른 척하지만 단순무식하고, 그러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고, 귀엽기까지 한 악당의 디테일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말짱 헛거다. 우연 속을 살아가는 생의 전형으로서, 그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저수지의 개들]이 갖는 하나의 매력점은 바로 이것, 백수로서 관객은 등장인물들과 친밀감을 느낀다. 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물론 다 백수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백수파워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백수가 되고 싶어한다.)
이제 [저수지의 개들]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점을 살펴보자. [...개들]은 하버마스에 대한 반박을 표명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비디오로 다시 보면서 그저 즐겁기만 했던 나는 평을 쓰러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딱 한 가지 모티브만을 주목하기로 했다. '시체가 벌떡 일어나 총을 쏘리라!'
인간들이 할 말을 제대로 안 하고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돌멩이들이라도 일어나 소리를 치리라는 얘긴 많이 들어봤지만 시체가 벌떡 일어나 총을 쏘는 건 솔직히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다 죽여놨는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서 악당이 칼휘두르는 별로 재미없는 영화 말고) 그리고 무척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한참 관객들은 미스터 블론드가 벌리는 우스운 파티에 완전몰입해서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불쌍한 포로와 블론드만 쳐다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시체처럼 쳐박혀 있던 물체가 일어나 꼿꼿하게 총을 쏘고, 그 뒤로는 그 살아난 사람의 회상이 펼쳐진다. 엎치락 뒤치락 떠들어대는 놈들의 시점 따라, 사건 따라 흘러가던 영화가 이제는 조금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경찰이 누구냐?' 의 답이 확연히 드러난 이상 더이상 이야기의 재미를 유지하는데 의문점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우리는 사건의 '심층분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다. 이 영화의 서술구조는 잘 알려진 대로 '일'-은행강도 사건 하나를 둘러싸고 거기에 참가한 여러 인물들의 전사와 후사들의 엮어짜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돈나의 노래에 대한 해석을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 또 열심히 밥을 먹는 갱들의 모습, 그리고 정말로 귀여운 크레딧의 뽀다구잡기가 나온 다음에 난데없이 날아오는 것은 펄프픽션을 꼭 닮은 허옇고 피칠갑된 차 안의 정경이다. 사건은 빠지고, 그 이후부터 시작한다. 그 뒤의 모든 상황들, 대립들, 회상들은 모두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도대체 이놈의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원인색출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사건의 '전모'는 조금씩 조금씩 맛을 보여주며 등장하게 된다.
한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전체가 모여드는 것은 물론 가끔 볼 수 있는 신선한 구성이다. 매리 램버트의 [씨에스타]의 빨아들일 듯한 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최근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열두 원숭이]만 해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 [저수지의 개들] 하나만을 두고 기존의 서술구조를 파괴하는 역작이니 뭐니 하고 떠들어댈 이유는 사실 없다. 공정히 판단하건대, 기존의 서술구조를 파괴했다기 보다는, 그런건 싹 무시하고 가장 흥미가 가는 방식으로 서술방법을 새로 만들어봤다는 편이 타란티노의 입장에서는 더 칭찬으로 받아들일 평가일듯 싶다. 영화에 있어서, '기존'의 것을, 기존의 강력하고도 오래된 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고다르 이후에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는 주장하기도 좀 쑥스럽다. 이를테면 뒤샹의 수염 단 모나리자나 미술전시장에 내놓은 양변기는 딱 한번 예술이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이후에 칫솔, 요강, 틀니, 이쑤시개 아무리 레파토리를 다양하게 내놓는다고 해도 그 행위들은 처음의 충격, 그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순 없기 때문이다. 즉 안티-예술은 단 한번만 예술이란 말이다. 안티-전통 또한 그렇다. 전통을 깨는 양식 자체가 전통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긴 하지만 그것은 이미 '처음의 새로움', 즉 '낡음'과 대립하는 '새로움'은 아닌 것이다.
도리어, 요즈음의 '새로움'은 '낡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새로움'와 대적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컬트는 자기 이름을 지키고 얼터너티브는 팝과 경쟁하지 않는다. 프랑스 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는 그 거대한 헐리우드 영화로부터 우리의 감수성을 지키는 얼터너티브(대안)의 역할을 기대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깐느조차 보여주었었다. (미국 영화 [펄프픽션]의 대상수상을 통해) 얼터너티브-대안적 프로젝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나쁜 소식은 '대안'이란 실질적으로는 그것이 저항하려고 하는 혹은 대체하려고 하는 대상이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며 또 한편 논리적으로는 스스로 대체할 만한 능력이 되는 모습으로 태어나야 남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항을 하고 싶어도 그 대상은 하나로 잘 정립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멋지게 프로그래밍하고 싶어도 실제에 적용을 하면서 실천 와중에 새로이 태어나기 전에는 -즉 실현과정 전에는- '가당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은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도, 또 다른 매너리즘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담이지만, 얼터너티브 영화를 표방하는 영화잡지 키노를 전혀 신용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지금 존재하고, 또 열심히 활동하는 '새로움'들은 스스로 무엇에 대한 '대안'이 되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무언가를 향한 '통로'로서 열어두려 하는 '새로움들'이다. '통로'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여정이며 동시에 자체를 새로운 차원의 스펙트럼으로 삼는 최신버전의 블랙홀이다. 이를테면 지겨운 일상에 대해, 또는 이젠 말하기도 싫은 우습지도 않은 여성억압에 대해 정면으로 시위를 하는 [텔마와 루이스]보다는 아주 예쁘장한 색깔의 빈 창고 속에서 답답증에 걸릴락 말락 하면서 때 아닌 갱들의 리얼한 우스개를 풀어나가는 [개들]이 훨씬 '강도높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소리치는' 사진보다는 '생각에 잠기는' 사진이 훨씬 파괴적이듯이, 영화 역시 소리치기 보다는, 찍어 누르기 보다는, 한 마디 말이라도 제대로 걸고, 나의 도식화되어가는 뇌파작용에 제동을 걸어 잠시 멈추게 하는, 수많은 말들이 기어이 내 속에서도 스멀스멀 기어오르게 하는 영화가 '돌파하는' 영화, 그래서 정말 괜찮은 영화가 되리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저수지의 개들]의 새로움은 그래서 타란티노적인 색깔을 지닌, 어디에 대들거나 대안적 망루를 쌓거나 하는 것이 아닌 요동하는 새로움들의 한쪽 결에서 뽑아내는 '개중 하나'의 새로움이다. 물론 여러가지 새로움들이 이 영화를 구성한다. 신세대영화로서 손색이 없는 색감각이나 촬영의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보는 사람을 즐거워 미치게 만드는 '색깔 논쟁' 에피소드의 독특함, 뿐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흘려가며 들려주는 너무나 리얼한 시간진행들의 다발들이 어떻게 보면 너무나 많은 새로움들을 구성하고 있는데, '하나'라? 방점은 '개중'에 찍혀 있었다. 스스로를 유일하거나 보편적인 존재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수지의 개들]에 대해 '재밌다'는 말 빼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영화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슬며시 배어들고, 반기를 드는둥 마는둥 하면서도 은근히 다 뒤엎어버리는, 효율적인 경로를 개척하고 있는 우리의 동지, '복수의 진리'파라는 것이었다. 복수의 진리파란, 진리는 단일하게 한 개의 칩으로 저장.인출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한평생 수도하며 구하더라도 그 얻어질 진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내뱉는 자들을 말한다. 혹시라도 존재한다면, 아마 여러 개의- 복수의 진리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사랑을 하고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해둘 수 있다. 서로 다른 인종들과 문화들과 개성들의 흐름 속에서, 그 상호역학관계의 긴장과 움직임 속에서-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된다. 새로움이 다른 새로움 옆에서, 안에서 새롭듯이.
이야기가 너무 멀리 돌긴 했지만, 다시 이 글의 주제, 시체로 돌아가자. 내가 아직 죽지도 않은 미스터 오렌지를 시체라고 부른다고 오렌지의 팬들이 속상해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창고에 차례차레로 들어오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저수지의 개들] 비디오를 보고 있는 마루에 들락날락하시는 부모님들마저 '저건 왠 시체냐?' 하시는데야, 나의 개념을 믿을 수밖에.
시체는 이 영화에서 인간들, 정확히 말하면 문제를 커뮤니케이션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능력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오고 있다. 아직까지 오렌지가 아파서 요동을 칠 정신이 있을 때 핑크가 창고 안에 들어와 논쟁을 시작한 이후로, 끝까지 영화의 사건전개는 누가 경찰이냐? 언제 병원에 데려가냐? 기다리냐 마냐? 누가 가냐? 등등 끝도 없는 다툼으로 이루어진다. 갱들은 걸핏하면 핏대세워 싸우려고 하고, 우리의 양아치 미스터 핑크는 'professional'을 주장하며 커뮤니케이션을 선도하려 한다. 하지만 말로 해도, 어떤 게 진실인지를 입증할 방도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 커뮤니케이션론이란 한갓 무력한 것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 웃기지 말라고 그래. 사건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다시 한번 말에 관한 영화다. 이야기 표면을 흐르는 중심이 말에 놓여 있다는 점, 대사로써 상당한 리얼리티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말에 관한, 말로써 된 말천지인 영화지만, 결국 말론-언어에 의존한 해결을 꿈꾸는 모든 파산한 이론에 대한 확인사살이다.
그래서 시체가 일어서 총을 쏜다. 논쟁의 사각 지역에서 논쟁 대상 중의 하나로서 방치되었던, 잊혀졌던 시체가 일어나서 인간들의 문제, 부당함, 그리고 대안적 논의, 진위판별의 기술상의 난점 등등을 모두 물리치고 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 '깨는' 한 순간을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쟁을 지켜봤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다음에 영화가 끝나는 건 아니다. 논쟁에서 자유로와져서, 훨훨 미스터 오렌지의 숨겨진 얘기 속으로, 다 뒤틀어진 이번 일의 초기상태와 원인들 속으로 심층활강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냉정하면서도 새로운 애정을 느끼면서 사건 속의 진짜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타란티노의 이 이야기는 진위판정의 말들(논쟁들-갱들의 담론)을 잔뜩 깔아놓긴 하지만, 이를 부정할 때 그대로 진실 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진위의 차이를 그냥 유야무야하지도 않고 진리가 벗겨지는 과정 옆에서 바라보고 즐기는 긴 대기실의 복도를 만들고 있다.
뚜껑을 열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는 일종의 사고훈련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과정의 즐거움과 즐거움 중의 반짝이는 자극은 진정한 영화적인 가치를 발하고 있다. 창고 안의 한정된 장소를 중심으로 현재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연극적이지 않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긴 무엇보다도, 그 창고에는 한켠에 배우가 등장할 만한 유일한 구름다리가 있는데(나의 사견이지만 꼭 무슨 세익스피어 이전의 연극에서 신이 걸어내려왔을 것 같은 아치형의 문에서 뻗어나온다) 우리의 시체- 미스터 오렌지가 그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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