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숭고-유머에 대하여 19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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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재 영상물의 한 현저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숭고-유머에 대한 고찰이다. 이는 여러 영화, 뮤직비디오, CF 등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나 가장 뚜렷이 모양을 드러내는 샘 레이미 감독의
[퀵앤데드], 크리스 누난 감독의
[꼬마돼지베이브]를 비롯한 영화들 중심으로 얘기하겠다. 따라서 이 글은 하나의 작품으로 제한된 대상에 대한 비평이 아니며, 현재 영화의 흐름의 한 단면이자 우리의 지각능력을 확장하는 감수성의 교육과정에 대한 작은 분석이다.
이 글은 궁극적으로 영화를 우리의 심리를 잡아끄는 내용-이야기로 보는 견해나 시간때우기용 스쳐지나가는 오락물로 보는 견해 외에도, 산업화가 발명한 뛰어난 감각훈련자이자 우리의 감각-사유 자체로 보는 '훌륭한' 견해 역시 건재함을 보여주는 데 기여하길 희망한다.
숭고-유머의 개념은 아직까지 비평계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 개념으로, 충분한 설명과 공감을 위해서는 책을 하나 써야할 일이겠지만, 지면의 부족으로 여기서는 영화에 관련된 부분만 중점적으로 다루며 근거가 될 최소한의 이론만을 간략히 제시하겠다.
유머의 미덕
웃음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공포를 이기는 가장 오래된 감성훈련이다. 물론 우선적으로 이 목적을 위해 웃음이 개발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무튼 진지하고도 감성적으로 주인공의 심정에 몰입하는 드라마와는 정 반대의 심정으로 우리는 웃는다. 우리는 우리가 그 웃기는 상황, 운명으로부터 전혀 상관없이 떨어져있다는 고마운 사실에서 웃을 여유가 나는 것이다.
스타일적인 면에서는, 유머만이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진솔함을 갖추고 있다. 이미 꺾여버린 브레히트식의 소외효과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상-예술 내지는 문화상품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효과를 갖기 위해 스스로 믿으며, 수용자에게도 믿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거대한 오락산업인 영화에서는 소외효과란 매우 있기 어려운 것이다.
유머가 우릴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은, 우리의 횡경막이 진동하며 눈물이 찔끔 나는 순간까지 긴 여운을 남기는, 바로 직전의 아- 하고 머리 속의 무언가가 뚫려나가는, 사고가 또 다른 시각, 전망을 얻는 순간이다. 기본적으로 유머의 지성은 접합되어 있던 것을 똑 떨어뜨리는 순간에 있다. 자신과, 인생과, 인간이라는 것을 낯설고 고립된 하나의 사물로 읽어들이는 순간, 작가는 아무 얘기 않지만 각자는 생각하게 된다.
유머는 분석되지 않는다. 부조화가 반드시 웃음을 부르는 건 아니다. 하찮게 여기고 경멸하는 행위는 일상 속에서 발견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다. 나쁜 것마저 더이상 나쁘지 않은 것, 즉 우스운 것으로 변화시키고 마는 웃음의 성격은, 효과는 명백하지만 분해해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도 미적 판단력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도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판단이다. 대개 우스개 이야기는 웃음의 공유를 주요 관건으로 하는데, 그래야만 재밌게 들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전달자가 되어 전달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편성의 기초로서 문화를 공유할 때 유머는 이해되며, 웃음 속에서 수용자는 비평적 의식을 키운다. 모든 측면에서 유머는 사회적이다.
전통적으로 유머는 이야기가 선적으로 전개되는 문학에서 주로 등장했고, 영화의 경우도 좌충우돌 코메디의 단편적인 걸직한 재미 외에는 대개 상황의 엇나감, 비틀림에 의존한 내러티브식 유머에 치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방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만화로서, 단 한 컷으로서도 모든 이야기와 사유를 전달하며 피식 웃음짓게 만드는 놀라운 형식이다. 카툰은 이런 식으로 과거에 신문만화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실상 모든 만화는 특히 순정만화는 그 섬세하고 다양한 화면분할로써 감각적인 사유를 행할 수 있다. 만화의 어법을 이용한 유머 역시 활발하다. 영화 역시 하나의 면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스크린 위의 이미지로서 우선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영화는 카메라가 움직이기에, 굳이 한 장면 한 순간에 모든 요소들을 담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문학적 전통을 쉽게 따라간다. 이런 관행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면과 연관되지 않는 하나의 장면으로서 웃음을 추구하는 한 가지 기법이 있으니, 그것이 이 글에서 주로 말하고자 하는 숭고-유머다.
숭고라는 것
숭고란 무엇인가? 먼저 숭고라는 개념을 우리가 흔히 협소하게 알고 있는 대로의 비극적 숭고미에 한정시키지 않도록 하자.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식의 목숨을 구하는 어머니나, 목숨바쳐 조국을 구하려하는 열사들의 '숭고한' 죽음 외에는 대체로 용법 자체를 접하기 힘들긴 하다. 그러나 최소한, 격렬한 관악기의 배경음을 뒤로 하고 벌어지는 영웅적인 추억의 옛영화나, 베토벤 6번 교향곡의 영원한 변종인 듯한 거대 합창단의 목소리가 압도하는 중에 우리 눈을 장악하곤 하는 웅장한 장면들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눈덮인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도 좋다. [시민 케인]도 좋고 [쥬라기 공원]도 좋고 [다이하드3]도 좋다. 이 모든 것은 숭고에 해당된다.
칸트의 숭고 개념을 기본적으로 설명하자면, 숭고란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일종의 쾌감이다. 단, 이 쾌감은 대상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지각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능력과 상상력 간의 불일치로 인해 느끼는 복잡하고 주관적인 쾌락이다.
이를테면, 너무나 커서 한눈엔 그 크기가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모습에 대해 인간의 감각기관은 부족하기 그지 없고, 격렬하게 소용돌이 치는 바다에 대해 인간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이에 대해 인간은 무력하게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하여 무한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에까지 접근시키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대해서는 자기 내부의 우월성-인간성-을 깨달음으로 인해 공포가 아닌 숭고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판단력 비판])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한 우주의 개념을 가질 수 있지만 무한성을 감성적으로 지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늘 무한한 우주로 뻗어나가는 장면은 우리를 압도하며, 끌어당기는 것이다.
칸트의 비판철학을 이루고 있는 잘 짜여진 개념과 구성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야 없지만, 그의 개념은 최소한 숭고라는 것이 갖는 기본 메카니즘에 대해서만큼은 최적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작용에 의해,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오는 쾌감. 이 개념을 숭고라 부르기로 하겠다. 다른 여러 양상들도 이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지금은 다 잊어버렸겠지만 처음으로 사람의 손보다 작은 핸드폰이 신문광고에 나왔을 때 우리가 느낀 아찔함은 그것이 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개념을 뛰어넘은 작은 것에 대해서이지만 숭고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 인간 스스로의 기술력에 대한 두려움과 쾌감인 것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숭고
여기에서, 영화만큼 지각의 한계를 실험하기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영화는 대중에게 산업화에 걸맞는 새로운 감각을 훈련시키는 손쉽고도 값진 오락거리였다. 영화의 수용은 기본적으로 마치 콘베이어벨트의 리듬에 수동적으로 그냥 내맡겨진 미숙련 노동자의 경험과 유사하다. 화면은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돌아가며,
<충격의 형식을 띤 지각>이 영화에 있어선 일종의
<형식적 원리>가 되었다.([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벤야민) 그러나 이미지의 연결들이 갖는 무차별성, 그리고 이것이 강제적으로 만들어내는 독자적인 시간-흐름이라는 특성이 카메라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그리고 인간 눈의 제한을 뛰어넘어 날아다니는 새로운 대체-눈의 성격과 결합하면 전혀 새로운 지각의 방식을 제시하며,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를 단숨에 폭파해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벤야민의 선구적인 고찰을 들어보자면,
<영화는, 어떻게 해서 물질이 인간과 함께 영화구성의 중요요소가 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최초의 예술수단이다.>([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클로즈업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의 팔, 누군가의 눈, 누군가의 움직임,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과 운동의 단편들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면을 이루며 앞서 지나간 이미지와 함께 동등한 하나의 이미지로서 작용한다. 즉 길모퉁이의 돌과 아이의 눈물은 차별이 없다.
그리고 이 지각방식의 수용은 대중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그 기술복제 시스템으로 인해 회화나 관현악 같은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에 형성된 예술형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데, 그것은 관객이 비평가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평적 태도란 관객이 배우와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하며, 또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동시에 의식하고 어떤 물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90년대에 한국사회에 범람하게 된 '영화는 아무나 비평하는 태도'는 그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영화가 평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만한 대중적인 인기와 이만한 비평적 가치를 지니는 예술-문화상품은 아직까지 영화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기는 앞으로는 게임이라든가 또다른 새로운 형식에 의해 따라잡힐 수도 있지만, 대중적이고도 독특한 수용방식으로 인해 영화가 갖는 지각확장의 기능은 고유한 것이다.
빠른 속도로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최대한으로 분절된 시간과 공간의 다양한 연결들을 체험의 범주로 지니게 한다. 영화가 발명된 뒤 얼마 안 되어 나타난 몽타주 기법은 그것이 표현매체가 제한된 무성영화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접합의 격렬함에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게 영화의 작동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갈수록 기법은 세련화되고 우리의 지각도 마찬가지지만, 근본적인 지각 확장의 기능은 여전하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이란 단지 수동적이고 자연적인 외부자극의 수용이 아니다. 지각知覺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보는' 지적인 행위인 것이다.)
초창기 영화에서는 어떻게 프레임을 잡든 간에 인물의 얼굴은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클로즈업이 지금처럼 무자비하게 얼굴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도 헐리우드에서는 한동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체와 얼굴과 상관없이 내뻗어 있는 하나의 팔은,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며 유기체의 통일 속에 우선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독립된 아나키스트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기초로 삼고있는 개인이라고 하는 것, 그 테두리를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인 영화 역시 자체의 탈영토화하는 운동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는 개인과 유기체와 잘 다듬어진 질서를 벗어나서 언제나 그런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는 계급과 갈등, 단편들, 욕망의 흐름에 위치한다. 영화는 기계적이며, 막을 수 없는 운동성을 지닌다.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은 언제나 양식상의 문제에 관련한다. 촌스럽지 않기 위해서, 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충격은 숭고와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익숙해진 것은 더이상 충격이 아니며, 새로운 충격은 얼만큼의 기간이 지난 뒤 익숙해진다. 헐리우드 블럭벅스터가 열심히 추구하는 특수효과는 자체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흥행에 일조하는데, 이는 새로운 충격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관객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광각렌즈와 적절한 로우 앵글을 이용하는 양적인 숭고의 추구 역시 충격과 익숙함을 되풀이하는 운동을 한다. 특수효과처럼 의식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리의 쾌감의 중대원천이다.
숭고의 진화
대한극장의 70mm 대형화면의 개막과 함께하는
[벤허] 시대의 스펙타클은 고래의 비극적 숭고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오로지 양적이고 공간적인 측면에서 숭고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시네마스코프는 각 가정의 거실을 점유한 텔레비전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겠지만, 거대한 화면으로 압도하는 영화의 장점을 활용하여 양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고고한 전망을 관객들에게 심어준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광활함과 숭고한 기상은 그 시각적 경험을 한 세대에게 이미 침투되어 있다. 그후,
[스타워즈]를 비롯한 수많은 SF, 액션 영화들은 '사실적인' 조망을 무기로 지구 위에 사는 키 작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광대함을 끊임없이 늘려놓았다.
더이상 비극적인 숭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없는 시점에 와서, 스펙타클이라는 '숭고의 계량화'는 전통적인 숭고의 장엄함을 가진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상으로 양적인 추구는 계속되지만, 이전과 같은 경건한 압도감을 인간에게 줄 수 없다. 계량화된 숭고는 점점 그 대상보다는 포착방법에, 광각과 로우앵글 쪽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전보다 더 큰 시야를 보여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각렌즈의 효과는 그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우스운 것이 된다. 그 수준을 넘으면서, 시대의 감각을 이끌면서 멋진 화면으로 되기 위해서는 스타일 속에 성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는 요즘의 눈으로 봐도 상당히 깨는 광각과 시각적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이것이 당시(1971년) 사람들의 눈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일이다. 이미 지금에는 그 광각의 공포와 쾌감의 크기는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 우리세대 젊은이의 눈에 깎임 없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제인 캄피온의
[스위티]에서 보이는 텅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광기에 홀린 사각斜角의 화면까지는 와야한다. 어쩌면 지금은 이미
[엘 마리아치] 시작 부분의 왕광각에 웃어제끼며
[저수지의 개들]의 화려하기 그지 없는 화면 정도는 익숙하게 즐기고 있으니 그걸로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이미 익숙해버린 것으론, 충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의 성격인데, 영화는 예술이기 전에 테크놀로지로서, 동시대인의 감수성을 떠나서는 수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와 감각 운동
하나의 영화는 단지 그 작품 하나로 보여지지 않는다. 먼저 수많은 영화와, 티비드라마와, CF가 있고, 그 이미지들과의 연장선에서 장면들은 자기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상물들은 수용자를 둘러싸고 미감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는 환경을 이루며, 이들은 같이, 상호작용하면서 감각운동을 추동한다. 테크놀로지는 단지 영화제작과 관련된 독자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지각을 변화형성시키는 수많은 기계장치이고, 그 결합인 네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것은 자극의 메카니즘과 망각의 미덕이다. 자극은 반복되면 효과가 감소한다는 고전적인 원칙, 그리고 새로운 것은 수많은 모방에 의해 곧 익숙한 것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이 되풀이되다 보면 망각의 미덕에 의해 아주 옛날의 것이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짧은 뮤직비디오를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한동안 MTV를 심심찮게 채우던 촌스러운 복고풍 화면은 (색깔 앵글 모두 다) 빠방한 화면보다도 오히려 상쾌한 즐거움을 주었다. 온갖 기술-광각과 조명과 분절적인 샷들, 컴퓨터 그래픽을 총동원해 근사한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은 최근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재미난 건 덩달아 정말 촌스럽던 시절, 80년대의 것마저 유머러스하게 느껴지고, 재밌고, 멋있기까지하다는 것이다. 망각의 힘은 놀랍다. 70년대 유행은 한 흐름에선 지금 촌스러운 것이 아름답다를 넘어서 벌써 그냥 아름답다의 기준을 차지해버렸다. 그 과정엔 자극의 정도를 높이고 높이는 과정을 통한 익숙함이란 은밀한 작업이 있다. 최근의 패션사진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번들거리는 조명도 그 과정을 밟고 있다고 본다. 처음엔 촌스럽고, 동시에 재밌는 것이 되지만, 좀더 나가면 그 번들거림이 그대로 세련됨으로 지각되게 된다.
영화에선 앞서 말한 대로 광각을 [다크맨]의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어둡고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도시의 이미지(버즈아이 뷰)는 상당히 만화같기에 유머가 된다. 망각의 미덕이 서서히 먹혀들어가 평평하고 깊이감 없는 장면들이 광각과 나란히 붙어서기도 한다. 대응은 복잡다양하다.
숭고가 유머를 만날 때
공포영화가 자신을 돌아볼 때,
[이블데드] 같은 명작 유머가 나온다. 샘 레이미 감독의 [이블데드] 시리즈는 무엇보다도 공포영화에 대한 패러디로서, 새로운 공포영화이자 유머이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블데드2]로서, 전편과 전연 연관없는 인물로 시작한 주인공이 첫번째 악령과 대면한 후, 갑자기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전형적인 악령퇴치자로 돌변해가는 것이다. 전편의 기억이 잊을 만 하면 개입해들어오며, 그렇다고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영화관습에 대한 즐거운 조크다. 물론 공포영화가 만들어내는 오싹하는 두려움을 숭고라고 부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포가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와 숭고가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의 모양이 아주 비슷한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결론은 늘 유머다. ([이블데드]는 공포물로서의 유머가 숭고-유머와 늘 혼재되어있다. 공포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법으로 숭고-유머를 택한다고 보아야할듯 하다.)
계량적으로 숭고화하는 양식을 끝까지 가동시켰을 때, 숭고는 정반대의 것을 보는데, 그것이 유머다. 더이상 숭고가 가능하지 않게 된 시대이기에 유머만이 통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작부터 비극적 숭고미는 스릴러와 공포물이 대체했었다. 그러나 왜 유머는 숭고를 주목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가치와 감수성을 변화시키길 원하기 때문이다. 더이상 컴플렉스처럼 거대한 것, 빠른 것-미분화된 것, 고귀한 것을 찾아 달려가고 싶지 않기에 역회전한다. 웃음은 다른 위치를 부여한다.
이것은 양적 숭고 외에도 숭고의 그림자가 드리운 모든 양식들-중세의 어두운 숲의 그림자와 연결된 동화적 삽화, 희생이나 애국심의 주제와 관련된 것들, 비장미를 돋우는 미세한 장치들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꼬마돼지 베이브]의 유머는 계량적 숭고뿐만이 아니라 '높은 가치'의 숭고를 주요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는 크레딧부터 의미심장하게도 돼지 그림의 액자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야기꾼 아저씨가 있으며 서사시의 합창단 역을 맡는 귀여운 쥐들도 등장한다. 막간의 제목, 가끔씩 등장하는 동그란 아이리스, 그리고 의인화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병치까지,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완벽한 장치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많은 번득이는 숭고-유머의 장면들은 광각뿐만이 아니라 동화의 음침한 세계에 대한 유머로서 복합적으로 만들어져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양치기개 대회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준 꼬마 돼지와 주인아저씨에 대한 관객의 엄청난 열광적 호응, 동그랗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마주보는 두 인물은 바로 숭고란 이런 것이다 라는 숭고 그 자체의 패러디이다. [꼬마돼지베이브]는 최대한 고답적인 숭고까지 거슬러올라가
우리세대에서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숭고한 감동을 유머와 함께 엮음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아주 신선한 향수이다.
이러한 양식을 아주 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노리코 사사키의 만화
[닥터 스쿠르](대원문화출판사)인데, 이 만화는 기본 개념자체가 썰렁미의 추구로서 언제나 상황과 상식에 대해 오버하는-감정의 과잉을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을 코믹하게 포착하고 있다. [닥터스쿠루]가 제시하는 화면들은 그대로 과거의 숭고류에 대한 유머다. <그림1>을 보자. 이는 결코 '도전해 보는 거야!' 하는 마음들을 비웃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80년대 뮤직비디오에서 가끔 보는 '보석같은 샷들' 처럼, 따듯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향수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퀵앤데드]의 보안관 별과 등치된 조그만 사람의 모습은 광각의 극단을 보여줌으로써 사람을 아찔하게 만들며,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한다. (그림2) 그러나 이 영화 자체는 비장미라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서, 곳곳에 기법들에 대한 시각들을 내비치고 있다. (인물 새로 휘몰아쳐오는 바람, 비장한 음악, 비극적인 운명 설정과 누층적인 리얼리티 확립 등) 더 큰 광각이 곧 시야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한계점에서는 작은 사물과 인간이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공평한' 지각에 이른다는 것은 독특한 시각훈련의 경험이 된다. 이것은 회고와 비평의 정신이 계량적 숭고의 양식 자체의 운동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감각과 결합되어서야 가능한 것이다.
이와 달리 [타락천사]의 왕광각은 숭고 양식에 대한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실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재미있다. [타락천사]가 보여주었던 광각의 세계는 우습고도 작은, 마치 우리들 소심한 현대인들 각자의 화장실을 들여다보는 몰래카메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왕가위나 두가풍의 인터뷰에서처럼 우연히, 개인적 목적의식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되기에는 너무나 의식적인, 시대의 오버제스쳐 자체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숭고-유머파의 자기의식적인 경향들은 주성치 영화와 [못말리는 조종사, 람보..] 시리즈,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그 못말리는 패러디 샐러드들과 함께 현재 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그 수많은 진지하고 에로틱하고 뽀다구나는 장면들이 어떻게 그렇게 차곡차곡 베껴지는지 감탄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휠씬 진지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 역시 피와 말잔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영화들의 인상적인 장면들로 채워져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패러디만이 아름답다!? 는 구호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더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기에 자기를 돌아보고 추억 속을 돌아보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라고는, 양식의 바로크단계로서, 이미 완성에 도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진행하는 것이니까. 현재 관객은 모범적인 자세로서 앞세대들보다 훨씬 비평자적인 태도로 영화를 본다. 양식적인 측면은 유머로서, 일반 관객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눈끝에서부터, 감수성의 촉수 끝으로부터, 잔혹한 제도의 위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단지 주장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기에 유머라는 감수성의 확인도장을 받아야 하는 듯하다. 왜, 다른 것은 없는가?
왜 우리세대는 유머에 집착하는가?
왜 촌스러운 것은 아름다운가? 어린애도 아니면서 앞이마에 체통없이 가로지는 꽃삔은, 얼굴이 커보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무릎 근처로 내려운 스커트 길이도 그렇다. 이것은 다리가 짧아보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오로지 다리가 길어보이기 위해서는 되도록 짧은 미니스커트만이 능사이며 관습이던 시대를 뒤로하고, 무조건 얼굴을 실제보다 더 날씬하게 보이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충돌하기에 쾌감을 주는 것이다. 어중간하게 갑자기 툭 끊어지는 스커트라인은 파괴의 쾌감과 함께 새로운 리듬감을 형성한다. 파괴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유머 속에 이루어진다. 단지 70년대 패션이 상업적인 이유나 히피정신의 계승을 이유로 다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은 젊은이들의 미감이라는 것이 어떤 중요한 지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전연 알지 못하는 바보스러움이다.
왜 유머가 아니면 안 먹히는가?에 대답하기 위해 거대담론의 몰락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 진지한 분위기나 반복학습 이상으로, 유머의 교육적 효과가 뛰어나기에 인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회로일 수 있다. 중앙집중적인 지적인 활동의 해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코드화를 비껴가는 것이다. 감성적인 것은 신세대의 특성처럼 선전되었지만, 감성적 인식이라는 것이 어떤 힘과 아름다움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이해가 부족하다. 네트와 결합할 때, 개개인들의 감성적 인식은 나름의 삶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유머라는 감수성은 스스로 나아간다. 횡경막의 충격과 함께, 혹은 눈에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깨어나는 무엇이 있다. 유머만이 생각하게 한다
유머만이 아름답다?
만약 지금이 바로크 단계라면, 그래서 유행처럼 속속들이 다른 영화들을 패러디하고, 자기반영적이 되고, 스스로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는 영화들만이 재미있고, 의미있고, 뛰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 아무도 아직까지 새로운 양식을, 전혀 다른 지각 개념으로써 이미지들을 이어붙이는 방식을 개발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한도 내에서만이 그럴 것이다.
영화의 앞날이 어떨지는 점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즐기는 서사물로서 2시간을 채우는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문화상품으로서는 점점 더 연명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게임과의 변종으로서 화려하게 재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는 과거의 놀랄만한 전통에 힘입어 관성적으로 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며 살아남을 지도 모른다. 디지탈장비의 발전으로 제작비가 싸게 먹히게 되면 영화는 보수적인 것과 혁신적인 것, 전혀 새로운 변종으로 다양하게 발달할 소지가 많아질 것이다.
지금의 과포화상태에 다다른 유머는, 낡은 질서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것을 소망하는, 지성의 자각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설명되고 밑줄긋고 외울 수 있는 코드화된 지식과 다르다. 이것은 일종의 증후로서, 대중적 차원에서 반응하는 폐기와 건설의 시점에 대한 예감이다. 이것은 단지 영화라는 제도에 한한 것이 아니라 영상물 전체, 그리고 우리의 지각능력과 인식체계 전체에 관한, 생활양식과 존재 자체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도움받은 책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민음사 1992
[영화1,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새길 1996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박영사 1992
[칸트의 비판철학] 질 들뢰즈 민음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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