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기술, [동물해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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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 Peter Singer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1999, 인간사랑)
-1975년작. 동물해방론의 성경과도 같은 책이라 함.
하지만 안 봐도 이 글 읽는 데 지장없음.
먼저 겉으로는 이 주제와는 별상관없어 보일지 모르는 얘기부터 하나 꺼내보자. 예전에
순독일제 한국인인 이한우씨가 어느 티비프로그램에 나와서 한국에도 미국의 흑인들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 말한 일이 있었다. 아니, 한국에 인종차별이? 워낙에 외국인이
없이 우리끼리 사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그가 지목한 것은 여성이었다.
생각해보면 여성들은 정말 지독스러운 차별을 받으며 일생을 산다. 한국 여자들은 특히나 엄청난 가부장제도에 얽혀 고생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비유였지만, 말이 되는 얘기다. 그러나, 그 깨달음 중에도 난 분명히 기분 나빴다.
기분 나빴다는 것은, 이 잘난 나를 흑인들과 비교해서 기분이 나쁘셨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흑인차별의식이 있다는 얘기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앞으론 정신차리자, 하고 다짐해보지만 말이다. 어쨋거나 나의 흑인차별의식은 대개 미국영화들을 보면서 형성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본 많은 영화들과 티비시리즈들에서는 좋은 애, 나쁜 애, 띨띨한 애, 잘난 애, 외로운 애, 감싸주는 애들은 모두 백인이고, 흑인은 언제나 '흑인'으로 나왔다. 혹은 흑인 깡패나 거지, 노예로.
그러니 나라고 하는 개인에게 무조건 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 다수가 흑인에 대해 품고있는 인종차별 의식,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뉴소중화주의에 대한 공격에서는 피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 new小中化주의: 조선인들이 전통적인 흠모의 대상인 중국 대신 새로이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미합중국을 섬기며 큰형 밑의 둘째자리로 자존심을 만족하며 다른 민족을 깔보는 의식 **
인종차별 의식과 죄책감
위의 사건에서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전세계적으로 여자의 처지가 흑인이 받는 인종차별보다 전혀 나을게 없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스스로 비교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선 기분 나빴던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차별하는 사회 속에서 그렇게 키우고 길러진 남성들에게 무조건 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는 셈이 되는가? 그건 그렇다. 그래서 많은 가정교육 잘 받은 백인남성들이 평소에는 늘상 신사적으로 행동하다가도 [사우스파크]의 주메뉴인 '스스럼 없는 여성격하'에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는 걸꺼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불합리와 치졸함들에 대해 전혀 생각없이 산 건 물론 자기 책임이다. 흑인차별에 둔감한 여자도, 여성차별에 둔감한 남자도 무조건적인 비난을 들을 순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종차별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죄책감 역시 대부분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의 얘기 이상으로 특별히 입증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동의해주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양심도 지각도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찾아읽기까지 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고, 흑인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차별엔 분노를 느끼고, 반대로 나 자신의 흑인 차별의식엔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흑인이 이 글을 읽으면 또 반응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좀 배운 서양인들은 자기네가 유럽의 식민지 강탈기간 동안 다른 인종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노예화한 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또 비슷한 이유로, 노동자들과 여성들을 비인간적인 노동에 혹사시킨 과거에 대해 오늘날 서구의 남성지식인들은 많이들 죄책감을 느낀다.
근래 한국사회에 유행한 현각스님의 [만행]을 난 감명깊게 읽었는데, 가장 부강한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난 수재인 그가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는 삶의 진실들을 마주해 느낀 죄책감에 대해서는, 그저 긍정만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독재정권을 후원해주는 중남미 국가 농장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싸고 질좋은 과일들이 풍성한 나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지옥같은 삶을 바탕으로 활짝 피어난 이 부자나라의 행복한 삶. 그래, 이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도리가! 그러나 이 사람 개인으로서는 진정으로 자기의 마음을 울리는 대로 따라간 것이겠지만, '죄책감에서 기반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난 일단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동물해방]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명제 하에, 인간이 자기네 종이 아닌 다른 종들(짐승)에 대해 갖고 있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권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원칙을 무시하고 흑인차별을 한것에서 죄책감을 느끼듯이 동물평등의 원칙을 차마 알지 못하고 소나 닭을 차별한 것에서 죄책감을 느껴라, 그런게 되겠다.
이 어처구니 없는 궤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는 다음의 전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왜냐면 고통과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생물은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식물이 피를 흘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눈앞의 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이유로 동정한다. 특히 동물은 그 고통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하다. 그중에서도 빨간 피를 흘리는 동물의 모습은 우리 속의 두려움과 동정심을 자극한다. 식물이야 스트레스를 받건 죽건 관심없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궤변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 일반인이란 일요일마다 교회는 가지 않을지 몰라도 신을 믿고 교적에 올라가 있고 교회나 성당에서 결혼을 하고 장례를 치루는 백인 중산층, 동성애는 하느님이 주신 천성을 거역한 것이며 애완견은 가족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고 있는 '상식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식이 있기 때문에 자기네가 당연시 여기던 동물차별 의식에 대해 깨우침을 받아들이고, 부끄러워 할 줄 아며,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에도 참가할 수 있다.
[동물해방]을 읽다보면 구구절절이 동정심과 분노를 자극하는 동물들의 처참한 실상이 이어진다. 쓸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실험을 위해 희생되는 쥐들, 원숭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듣다보면, 내가 인간인게 민망할 정도이다. 예쁜 분홍색을 내기 위해 일부러 빈혈에 걸리도록 하여 가두어 키우는 비일송아지 얘길 보다보면, 미식가들의 식도락이란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몹시 회의가 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와 유제품을 만들기까지 동물들이 겪는 학대와 스트레스 만빵의 일생을 들어보면 인간들이 정말이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의 동정과 분노의 감정과 그 동물들의 고통과, 문제의 평등권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 평등권이란 단 하나의 전제로서 절대명제화되어 있다. 여기에 쉽사리 동조하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피터 싱어는 온건한 주장부터 시작해서 점차로 (결과적으로는) 자기 전제에 근거한 최대한의 결론으로 몰아간다. 먼저 필요없는 고통은 줄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로 시작해서 산업화 사회에서 동물권을 존중받고 살다 도살된 동물의 고기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육식을 하지 말자로 교묘히 옮아간다.
[동물해방]은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동정심과 분노를 끊임없이 죄책감으로 변환시켜, 결과적으로 같은 결론(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을 얻음으로써 자기 논리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고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방점은 고통에 찍혀있다. 온통 고통에 관한 보고서다. 아기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놓고 가짜악질어미를 만들어 괴롭히는 실험이 인간의 정신병리적인 연구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이 모든 비극적 코메디는 동물실험이 대부분 별쓸모없고, 그저 연구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한 효용밖에 채워주질 못하는, 인간의 무식한 과학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인간한테 효과가 어떨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른 동물들한테 실험을 해보는 건 역시 재고를 해봐야 한다. 같은 종인 인간 안에서도 체질에 따라 독이 되는 것과 약이 되는 것이 저마다 다른데, 아예 다른 종을 갖다 놓고 실험을 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가 있을 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점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재고와 혁신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의 채식주의 이데올로기가 집단적으로 자극하는 '죄책감의 기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동물해방]은 고문기술자 이상으로 세련되고, 더 솔직하게 죄책감의 기술을 발휘한다.
동물해방이라는 목적을 위해선 인간의 감정을 그릇된 방식으로 오용해도 좋단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사실'을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안에, 지구 위에 붙어살고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위치와 힘을, 즉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조건 평등하다라니.. 말이 되질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우선 인간과 같은 종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모든 종은 일단 자신의 번성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인간의 인간이기주의는 윤리적 판단 이전에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태계 전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힘을 자각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행동해서 다른 생물들과 환경을 다 망가뜨리고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정말 문제일 것이다. 즉 무식이, 편견이 죄인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식물도 느낀다. 그렇다면 왜 식물에 대해선 죄책감을 갖지 않나? 뇌가 달려있어서 전문적으로 정신활동을 벌이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권리인 것인가? 논점이 잘못되었다.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당위나 죄책감 따위로는 정립할 수 없는, 본연의 자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 관점을 되찾아야 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해적함대와 현대의 동물해방론이 가지는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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