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허영심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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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심'이란게 없다면 우리 인간은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지구 위에 오밀조밀과밀하게 살고 있는 우리 인류에게 있어 허영심은 언어 이상으로 본질적인 특징
같다. 좀더 편하게 살고 싶은, 게으름의 욕구라는 것이 지금 인류의 기계문명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고 한다면, 허영심은 현대의 그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져나오는
상품들을 다 팔리게 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제각각 개인들의 인생을 자살하지 않고 살 만한 것으로 변환, 유지하게 하는 기저 에너지인 것이다. -
허영에 들떠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교훈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있고,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허영의 위험을 잘 다스려 가계부가 빵꾸나거나 카드빚을 짊어지거나
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나가도록 신경들을 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만 허영심이라는 단어를 접한다는 맹점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삶, 집요한
도전의 원동력이 되는 허영심의 기능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영심이 있기에 인간은 경쟁을 하고 자기개발을 하며, 허영심이 있기에 다이어트를 하고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자기 아닌 엄마의 허영심 때문이라도)
인간은 기대하지 않고, 때로는 아주 유치한 꿈을 꾸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수 없는 존재다. 많은 뛰어난 뮤지션들도 그 시작은 어린 시절 너무나도 멋있는 스타의
모습에 반해 자기도 그렇게 되고싶다는 '겉멋에 들린' 것이 대부분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프리랜서를 동경하고 무슨무슨 '아트'에 종사하고 싶어하는 것은 역시 자기
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정장을 입기 싫어해서 지금 이러고 산다. ^^*)
내가 지금 이렇게 허영심이란 것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영심이란 선한 것이다 류의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인간은 허영심 때
문에 피나는 노력으로 다이어트를 하지만, 허영심 때문에 멋진 싸나이가 되기 위해 독주를 퍼마시기도 한다. 결과가 멋진 몸매가 될지 간경화가 될지는 모르지만
허영심이란 것이 일으키는 것은 문화적 동물인 개개인의 의미있는 행동이며, 만족감과 행복이란 결과를 낳는다.
이를테면, 아이쇼핑하다가 너무나 마음에 드는 악세서리를 발견했을 때, 자기가 가진 기존 옷이나 소품들에 어울리는지 어쩐지, 값은 얼마나 되는지, 그거 대신 필
요한 걸 사면 후회없는 지출이 되진 않을런지 전혀 생각 않고 무조건 사버리는 충동구매는 허영심을 상당한 강도로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 아끼고 절
약했던 자신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저지르는 쾌락일 수도 있다. 어쨋거나, 낭비나 충동구매 대신에 검약의 정신을 실행한다면, 그것 역시 보
상과 쾌감(부의 축적, 빵빵한 저금통장이나 멋진 아파트)을 약속하는 더 큰 허영심의 차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술먹는 자리에서 '쏜다' 하고 자기가 내는 건 당연히도 여럿 앞에서 공식적으로 위신을 세우는 일이며 허영심의 오래된 본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류가 예전의
부족사회였던 시절, 실상은 여자들의 채집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으면서도, 가끔씩 사냥해온 고기라는 고단백 영양식품이 등장할 때는 그 고기를 여럿
에게 나누어주는 남자가 가장 멋지고 위대하기까지 해 보이는 자로서 한껏 위신을 세웠던 것이라는 문화인류학의 가설은 그럴싸하다. 즉 허영심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다.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낭비와 사치의 순간이 필요하다.
즉,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쇼핑에 충분할 만큼의 부가 필요하다. 그 돈을 남편이 벌었건 자기가 벌었건 물려받았건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위해서라면 되도록 많고, 비싼 사치품이 필요하다. 많은 여자들은 낭비와 사치에서만이 자신의 위신을 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자
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난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되겠다.
그건 단지 지금이 자본주의 사회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어떤 문명이든 특징적인 점은 그 잉여를 어떻게 쓰는가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낭비와 사치는 부
를 과시하기 위한 기본 자세다. 인류가 먹고사는데 하루를 다 보내지 않게 된 이후로, 이것이 인간에게는 달라붙어있다. 지금과는 전혀 엉뚱하게 다른 것을, 인간
은 상상한다.
쓸데없는 혹같은 존재들, 그런 것들이 인간의 삶에는 많이 붙어있다. 인사치레를 주고받아야 하는 수다장이 이웃, 마누라 잡아패는 술주정뱅이, 괜한 피해의식,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질투심 등등. 재미난 것은, 별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이런것들을 파고들어 거슬러올라가 보면, 다 인간에게 붙어있는 이유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이다. 이를테면, 피해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똑같은 속임수나 폭력에 또다시 희생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피해의식이 과잉될 때는 인간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할 수도 있지
만.
허영심의 전적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재미난 용도를 만나게 된다. 북아메리카 북서해안 지역에 부유한 문화를 이루었던 콰키우틀 족은 개인의 특권과 재산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선물을 하고, 재산을 파괴했다. 대표격으로 담요와 기름, 구리판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이 나라의 부의 경쟁은 치열해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라면, 상대가 선물한 것의 배로 선물을 하지 못하면 치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통해 맺어지는 두 가족의 예물 경쟁
은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부족의 수장은 포틀래치(potlach)의 향연 동안 자기 재산을 모두 파괴해 버리는 행위로써 막강한 위엄을 획득한다.
자본주의에 찌들은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부'라고 하는 것은 곧 '파괴해버릴 수 있는 능력'과 동일한 것인가 보다. 그들이 잉여를 관리하는
방법은 축적이 아니다. 축적을 통해서 부를 인정받는 우리 세상의 방식을 만약 그들이 들었다면 바보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0억 개의 담요나 100억개의 구리판이 무슨 소
용이겠는가. 멀쩡한 카누를 부수어 피운 불 속에 던지지 않을 것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되도록 싸게 사도록 노력하다니,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부자가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
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자본주의보다 오래된 것은 부족사회의 전통이다. 한국에서도 성대한 결혼식과 값비싼 예물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세우는 방식은 중요하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20세기 막판을 살아가는 현재 인류의 심리, 성격들은 거의 부족사회 시절에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난 문화인류학자도 아니고 깊이 연구를 안 해 봐서 확신은 할 수 없
지만, 허영심 역시 공동체(내지는 경제 단위) 안의 잉여를 적절히 분배하고 공동체 안의 관계를 조절하며 삶의 양식을 가다듬는 한 방법으로서 인류에게 채택되었을 것이다.
IMF 사태가 터졌을 때 언론과 '국민 여론'이라는 것에 두들겨 맞았던 이른바 부유층의 외제 사치품들은, 그들에겐 부를 과시하는 기본이었을 뿐이다. 즉,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크기의 부가 개인의 사치를 위해 쓰일 수 있는가에 대해, 또 부가 어느 정도 이상이면 다른 공동체 성원을 위해
혜택을 배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윤리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감수성은 자본주의 법칙처럼 공인되어 있지는 못하다. 어떤 사람에겐 5만원짜리가, 또 어떤 사
람에겐 5천만원짜리가 비싼 옷이 될 수 있으니까. 그건 자본주의 윤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윤리감각이다.
어찌 보면 한국인은 자본주의화가 전혀 덜 된 민족이다.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사회적 위신이 훨씬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성공하려면 실질적인 능력에 앞서 차가
고급이어야 하고, 양복이 고급이어야 하고, 돈을 잘 써야 하며, 남자이어야 한다고 한다. 특히 차의 허세에 있어서는 한국인을 따라갈 민족이 없다.
그러나, 외제차가 아니면 고급 호텔에 주차도 못하고, 밤의 압구정에 가보면 차의 급수와 옆에 태운 여자의 급수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하다못해 변변한 주차장 하나 없는 주
택에 전세로 살면서도 차만은 남에게 꿀리지 않는 배기량을 고수하는, 1인당 교통사고율 세계 순위를 무색하게 할 정도인 한국인의 자동차 위신의 경쟁은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될 악덕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부족사회인의 허세로서 유전자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나이를 먹고 사는 세상이 넓어졌으면 그에 맞게 자부심을 얻는 방식도 노회하고 세련되어져야 하는 법인데, 아직까지 너는 그 단계에 머물러있는가 하는, 나이를
먹어도 변한게 없는 유치함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유사 포틀래치가 자동차가 된 이유도 여전히 연구거리다.
어떤 종류의 허영심을 발동시키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달라진다. 개인의 부나 지위, 젊음,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것 외에도 자연스럽게 인간에게 따라붙는 여러 허영심들
은, 다 나름의 이유를 지닌다.
어린이들은 순진무구한 허영심이 있기에 나중에 커서 인류에 봉사하는 과학자가 되겠다고도 하고, 간호사가 되겠다고도 한다. 그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해서 과학자되는 일도 힘든
일이겠지만, 대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일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런 꿈을 키우는 것일까? 말은 숭고한 봉사의 직업이지만 가장 극심한 고통 바로 옆에서 자기 삶을 유
지하기 위해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는 중노동의 직업이 그 실상을 알고나서도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허영심은 정말로 많은 희생과 봉사의 정신과 상관이 있다. 자기의 '이기적인 삶' 밖의 세계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위하며 몸바치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단지 '자기 혈연이니까',
'이기적인 유전자의 책략에 따라'와 같은 단순한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허영심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원인이 있고, 허영심의 충족이라는 구체적인 쾌락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전쟁과 고문으로 죽게한 수많은 대의명분들은 사실 다 허영심이었다. 인간은 자기 한몸을 무사히 살리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라
든가 가족, 혹은 종교를 위해 희생을 하기 위해서는 그 희생에 상당하는 막강한 충족감으로 보상받아야 했으며 이것은 허영심과 같은 급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애국심이라든
가, 효심, 신앙심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대개 '숭고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가치들은 강렬한 허영심의 충족을 대가로 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가장 강한 것은 역시 공동체의 존속
을 위해서 특별강화한 가치일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식을 살리는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에 이르러서는 좀 급이 달라지는 문제라고 본다. 자기의 유한한 목숨 대신인 자식의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보전하는 유성생식의
방식은 허영심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기에는 좀더 직접적이고 오래된 본능을 필요로하며, 이 본능은 때에 따라선 자기 생명의 보존 욕구과 거의 같은 급이 되는 것이다. 자잘한 일들에
부딪히는 실생활에선 허영심이 더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제각각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고, 태어난 사회계층에 따라 성별과 능력에 따라 예측할 수 있는 사회적인 삶을 산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의
허영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나간다고 주장하련다. 어떤 사람들은 남과 달리 지식으로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으로, 남에게 끊임없
이 베푸는 것으로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자기 인생을 만들어나간다. 필요에 의해 사람들은 허영심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만, 그것이 하나의 사회 안에서 일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난 나만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고, 대륙간 여행을 간다.
199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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