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적과의 동침- '공생'의 그 성공적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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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비디오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를 즐겁게 보긴 했지만,
물론 이 얘기는 그 영화와 관계없다. ^^; 적과의 동침에서 주인공이 결국에 '적'을 쓰러트림에
따라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는 반대로, 지구의 35억년 간의 생명의 모험담에서는 언제나
'적'은 '우리편'이 됨에 따라 한 막이 내려지는 것이다. 아니라면, 역사는 끊어지고 만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간의 책 [마이크로코스모스](범양사)를 보면,
의무교육과정에서 배운 생물학 지식으로만 살아오던 우리들로서는 쇼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사실'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진화'라는 것에 대해 대중적으로
유포된 개념은 '다윈의 적자생존과 도태설'이다. 초등학교때부터 배운 '오로지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적자생존' 개념은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제창한 표어로,
19세기말의 자본가들이 극악스러운 노예노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다.
다윈이 말한 '적응'의 의미는 부당하고 가혹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산'多産을 의미한다. ([마이크로코스모스],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나오는 얘기다.)
지금까지 지구 생물의 진화사에서 중요했던 것은 경쟁이 아니라 공생이었다.
미토콘드리아의 DNA 구조가 밝혀지면서 드러난 것은, 미토콘드리아는 세포핵의
DNA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DNA를 가지는 개체(박테리아)였으며, 우리가 생명의 기본이라고
알고 있는 세포는 하나의 단일한 단위가 아니라 별개의 박테리아들이 모여 구성한 '군체'라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대부분의 생명체는 숨을 쉴 수 없다. 산소가 대기중에 잔뜩
깔리게 된 약 20억년전 이후로 산소를 싫어하고 황산이나 염산을 마시는 생명체들은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지하로 들어갔다. 산소를 호흡하는 능력을 지닌 미토콘드리아의
조상뻘되는 박테리아와 연합함으로써만이 생명체들은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첫번째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들 각자는 모두 박테리아가 모이고 모여
사는 군체라는 것이다. 근대화 이후의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들로서 우리가 갖는
개체 또는 '개인'이라는 것에 대한 '신앙'을 그지없이 짓밟아버리는 이 잔인한 진실 위에서
우리는 다시금 자기자신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미생물 군체로서 우리는 그 동안의
'인간중심주의'적 교육으로 너나없이 물들어있는 개인숭배주의, 이성이라든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우월성을 의심없이 상정하는 편견과 착각을 수정해야한 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박테리아들'이다. 박테리아들이 서로 돕고 살아나가려다 보니 복잡한 구조의
원생동물이 나오고, 더 복잡한 기관을 가진 동물과 식물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뇌를 통해 수행되는 인간의 지성이란 것은, 기본적으로는 '꼬리가 달려있어
이동할 수 있는' 박테리아의 속성(스피로헤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박테리아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박테리아는 35억년전 이후로 주욱 지구환경을 살기
좋게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고, 아주 능률적인 정보교환방법을 가지고 있다. 침입자를 인지하고
대처하며,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식물 역시 의심없이 지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체의 가장 기본적인 '인지작용'을 우리는 '물질대사활동'라고 부른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고 필요없는 것, 해가 되는 것을 내친다. 도리어, 인간의 지성이란
그 엄청난 복잡성과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자기 민족이나 인종이나 심지어는 자기
동네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종의 일원을 핍박하고 도살할 수도 있는 심각한 불합리와
잔인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처지이다.
나는 채소는 좋아하지만 채식주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 주의주장의
근거에 깔려있는 '뇌중심주의'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육류 우위의
식습관 속에서는 건강과 미용을 추구하기 힘들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좀더 막강한
'론'이 필요한 것은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론은 어느 쪽으로나 절대론적
냄새를 피우며 중용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살아있는 것'의 목숨을 함부로
뺏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식물도 먹지 못하고 버섯도 먹지 못한다. 어쩌면, 숨도 쉴수
없을지 모른다. 공기 중엔 수많은 미생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좀더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마도 단지 머리에 눈코입이 달려있기 때문에 인격화가 쉽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뒤의 뇌와 연결된다. 뇌와 그것이 보장하는 정신의 우월성을 가정할 때, 우리와 유사한 것으로서 동물의 우
위를 인정해주는 기만적인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은 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상태로 머물기 위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자기생산의 기제가 생명을 탄생시킨 이래로, 생명의 놀라울 정도의 대범한
도약과 진화의 성공스토리는 어느것 하나 존경스럽지 않은게 없다. 평생을 생명을 탐구하는데
바친 미생물학자의 명저에 대해 단지 감탄하면서 다른 분야에 조금 응용하는데 그치는
나로서는 더이상 넘겨짚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단지, 만약에 당신이 다른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를 원한다면 이를 위해 반드시 새로운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근거 없이 주장하거나 근거 없이 버티는 것은 곧 지고 말, 바보같은 전략이니까
말이다. 이미 있는 것들만 잘 연합하여도 우리는 충분한 파워를 얻을 수 있다. 린 마굴리스
외에도 카오스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일리야 프리고진, 자기조직하는 우주를 밝혀내는
에리히 얀치, 기본적으로 과학에서만도 이렇게 빵빵한 선배들이 포진하여 '중요한 것'을
전수해준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이론은 한국에선 이제야 대중적으로(일간지에) 소개가 되기 시작했는데,
하루 빨리 교과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과학은 평균 10년이 넘으면 이미
뒤떨어진 교리가 된다는게 정설인 분야인데도,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그리고 전문분야 사이의 교류와 통합에 대해서는 눈앞의 이해관계만 생각하는 꽉 막힌
교수들 수준을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새로운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가 통과해야 할 진화의 단계에서 카오스로 빠져버리지 않고, 그렇다고
차가운 우주로 식어버리지도 않고서, 카오스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질서를 포착하여 우리 자신을
그 흐름에 맡겨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최소 2번 이상의 칼럼으로써
좀더 자세한 미끼를 여러분께 던져보도록 하겠다.
덧붙여.....[마이크로코스모스]는 범양사에서 나왔는데 절판되었으니까, 수고스럽더라도
도서관에 가서 읽어주세요. 서초도서관에는 확실히 있습니다. 이 책 대신 저자들이 새롭게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섹스란 무엇인가?](지호)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내용이 2권에 갈라져서 약간 버전업되었고 사진 때깔이 죽여줍니다. 그러나
출판사에 재판 안 찍냐고 전화를 무더기로 하는것도 좋은 생각일지 모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니까요.
199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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