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감독은 포주다 -[파란대문]의 횡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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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대문]을 만든 김기덕 감독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이 말을 할 수
있다. 감독은 포주다. 아마도 감독이 자기자신을 투영한 것은 여관집 아들이었을
것이나 정작 스스로가 된 것은,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포주로서'였다.
그 인물을 포주라고도 부를 수 있고 기둥서방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포주는 창
녀를 사랑하고, 아껴주고,(가끔 귤도 사다준다) 보호해주며, 벼룩이 간을 떼어먹고
산다. 무식한 파렴치한 포주 역시 저보다 강한 남자를 만나서는 얻어터지고 말며,
그런 포주를 여자는 가엽게 여기고 안아준다. 포주 역시 약한 남자이며,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의해 여자를 사고, 강간하는 '일반적인 남자들'과 같은 남자
인 것이다. 그래서 가엽다, 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떼를 정당화하기 위해 창녀는 성녀가 된다. 스물 세살 먹
도록 그런 후진 여인숙에 올 때까지 몸을 팔던 여자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보살같
은' 마음을 지니고서 다소곳하고 청순한 자태로 온갖 고난에 대해 항변하지 않는
다. 이로써 충분히 알 수 있는 감독의 근본적 환상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특히 창녀는) 모든 걸 (엄마처럼) 포용하고 (엄마처럼) 용서하고 (엄마처
럼) 사랑한다.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여자다.)
그동안 되풀이되던 남자들의 엄마타령, 창녀타령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젊은'
감독이 만든 이 영화에서 예쁜 화면과 서정적인 분위기로 피어나고 있다. 도대체
가 한국 남자들이 꿈꾸고 있는, 그 세상 모든 희생을 다 갖다 안겨줘야 직성이 풀
린다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떨어진 것인가? 한탄이 절로 나온다. 늙은 놈이
나 젊은 놈이나 그건 전혀 다르지 않다는게
한국 남자들의, 특히 문인들이나 예술가연하는 늙은 남자들의 똥오줌 못 가리는
엄마타령은, 어쩌면 일제시대 동안 주서쌓은 모성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크지 않은
가,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일본을 아는건 별로 없지만, [국화와 칼]과 주서들은
요즘 얘기에 의하자면 일본 남자들의 유아독존 엄마타령은 한국 남자는 감히 따라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하니까.
내가 처음으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 [악어]를 봤을 때, 그 엽기적이고 특출난 캐릭
터가 주는 감동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찜찜하고 또 찜찜하고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건 여자가 입은 원피스였다. 짧은 원피스라는 것은 여자가 밤에 돌아다녀도 별걱
정없는, 치안이 잘 되어있는 도시생활에서나 입을 수 있는 옷으로서, 길거리 생활
을 하면서 입고도 무사하길 바랄 수 있는 옷은 아니다. '섹시하다'고는 하지만 입
는 본인으로선 만약에 일어날 수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완전 무방비 상태일 수밖
에 없는 좀 위험한 패션이다. 실제로 그 여자도 주인공에게 수차례 강간을 당한다.
그래도 계속 붙어있는건 지탓이겠지만. 한강변에 집도 절도 없이 거지에게 얹혀살
면서, 때와 장소를 못가리고 계속 원피스를 입고있는 여자가 미친년인지, 그걸 입
히고 있는 감독이 웃기는 놈인지에 대해서는 알아서들 판단하시라. 아무튼 그 원
피스의 악몽이 [파란대문]에서는 완전히 꽃피고 새울어 유장히 펼쳐진다.
[파란대문]의 한 축이 되는 창녀가 입는 옷은 줄창 짧은 원피스다.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인지 낮이나 밤이나 아침에 쭈그리고 앉아 이닦을 때나 불편하게 원
피스를 입고 있다. 또 한 축이 되는 여인숙의 대학생 딸네미는 처음엔 일관되게
바지만 입는다. 뚱뚱한 몸매에, 별로 여자답지 못한 헤어스타일, 그런데도 장하게
애인은 있다. 유독 남자들이 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는 '죽여주는 가슴'
이라고 계속 강조된다.
이 대학생이 치마를 입는 것은 창녀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려가면서부터이다. 자
기 가족의 생업이 창피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애꿎은 창녀한테만 퍼붓던 이 여자가
창녀가 꾸민 방과 단아한 감수성, 제법 잘 그린 그림들을 보고는 일종의 동화작용
을 일으키며 끌려가기 시작한다. 여관집 딸은 스스로 창피해서 창녀를 더럽다고
욕했었는데, 나중에 더럽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자, 즉 자기와 같은 사람,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자 동시에 '나도 한다' 주의로 돌아서는 것이다. 섹스를
졸라대는 애인에게 아직 안돼! 하며 거부하던 여자가 '더러운 섹스'에서 '더러운'이
라는 수식어를 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어디서 은근슬쩍 기어들어왔는지 모를
'아무나하고나 섹스'를 긍정하는 것은 이 영화 막판의 더없이 화려한 사기행각이
다.
가장 기똥찬 마지막 장면, 왠 여름에 눈이 사라락 쌓인 마당에 하얀 원피스를 입
은 주인집 딸 여자가 잠시 생각을 하고, 눈뭉치를 굴리고, 몸아픈 창녀 친구 대신
손님방에 들어간다. 그 몸매에 흰 원피스를 입힌 감독의 의도야 한여름에 눈발 날
릴 때부터 자명했기에 더더욱 코믹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분노를 다 가릴 수야
없다.
창녀는 순결하다. 왜냐면? 순결치 않은게 아니므로 순결하다. 여관집 딸이 갖고
있던 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것이 곧 '아무것도 아니니까 당해도
괜찮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에 대한 결벽증을 치유하는 것이 그대로 '아무에게나 다 주기'가 되는 것은 어
쩐 일인가? 그건 감독의 관념 속에서는 여자는 엄마와 창녀밖에, 좀더 나아가서는
그 합일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죄책감 없이 모든 여자를 강간하고 유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섹스란 곧 강간이다. 모든 남성에게 주는 모든 여성에
대한 강간권을 발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존재하는 성은 무조건적으로 강간으로서, 잘 해봐야 죄책감으로서의
성이다. 강간이라는 형태밖에 섹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그것이 '죄'이기 때문
이라는게 가장 그럴듯한 해답일 것이다. 아니면 본래 남자는 섹스하는 동물이고
여자는 섹스 안 하는 동물이다 이거나.
그러나 섹스를 해야 결과물로 생명이 탄생한다. 따라서 생명의 탄생을 맡고 있는
엄마는 '직업적으로' 죄인이며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성스러운 창녀가 되는 것이다.
죄책감으로 가득찬 성, 즉 섹스가 죄인 것은 엄마랑 하는 게 죄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적 환상의 근거를 찾아 정신분석까지는 못 하겠다. 그런
것은 내 취미가 아니다. 감독 개인을 붙잡고 심문을 하기보다는, 그런 망상이 가능
하도록 북돋아주는 사회적 망상,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남자들의 성의식 자체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는 사실을 지적하겠다.(칼럼 여성적 쾌락)
자본주의 치하의 남자들은 사춘기의 성억압 과정에서 섹스를 정당치 못한 것, 더
러운 것으로 주입받고 따라서 자기의 행동(섹스, 혹은 성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섹시한 여성 탓으로 돌리는 버릇을 익히기 쉽다. 나쁜 년의 유혹에 빠
진 자신은 아무 죄도 없단 식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강간 면죄부가 발생한다.
섹스가 죄임을 인정한 이상, 우리 모두 죄인이다 식의 면죄, 남자는 다 그래 하는
변명으로써 강간은 정당화된다.
웃기는 것은 창녀는 성적 써비스를 팔아먹고 사는 여자인데, 이 영화 내내 창녀
는 강간을 당하기만 한다. 제대로 몸을 파는 장면은 딱 한번 나오고, 제대로 연애
비슷한 걸 하는 것도 한번 나오는데 그다지 로맨틱하게 찍지는 않았다. 감독은 '성
을 팔아먹고 사는 것'과 '강간당하고 사는 것'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많은
창녀들이 그들을 업수이 여기는 남자들한테 강간당하는 일이 많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건 한 가지 분명한 전제 위에서이다. 그들을 물건으
로 여기는 것이다. 창녀라는 존재는 '무조건적 섹스 대상'으로 정의되었기에 그 여
자의 의사나 동의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다. 물건에게 주체적인 의사 따위가 있을
게 뭔가.
내가 보기엔 그렇다. 여관집 딸이 성의식의 변화 속에서 손님방으로 들어가는 그
장면의 속뜻은 이렇다. 아무 여자나 강간하고 싶고, 예쁜 여자를 따먹고 싶은 자신
의 숨겨진 욕망을 그대로 말하긴 뭐하니까 대신 모든 여자를 창녀로 만드는 것이
다. 창녀는 그래도 되니까. 자기딴엔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창녀를 위해서인지 모르
지만 모든 여자를 창녀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웃기는 아집은 심각한 남성
지배 야욕으로, 대가리에 똥밖에 든게 없는 것보다 휠씬더 유해한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새디즘도 그 정도면 병이다. (적당히 하면 섹슈얼리티지만, 지나치면 범죄
가 된다.)
강간과 죄책감의 돌고도는 순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한 장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구실이다. 경찰소 유치장에 하루밤 갇혀서는 너도 나도 다 가족의 생계
를 위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아빠 포주는 저번에 지가 강간했던
건 다 잊고 춥지 말라고 잠바를 벗어 덮어주며 동정표를 사려한다. 생계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연막을 치며 이 가족과 창녀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그려내려 시도
하면서 마지막에 붙여넣은 환하니 웃는 엄마 포주의 얼굴은 분노마저 일으킨다.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강변하는 건 더이상 궤변도 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아
무리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해도 몸을 안 판다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남처럼 돈을
쓸만큼 못 쓸 뿐이지. 그래서 비참할 수도 있다. 그 집 딸이 대학을 갈 돈은 없었
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의 영역은 아니다. 선택의 차원이지.
그들을 동정하는 창녀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년이고, 그 창녀와 교감하며 그를
따라가는 대학생은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년이다. 세상에 동정으로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 자선으로 굶어죽지 않는 것은 잠시에 불과하다.
창녀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실은 폭압에 맞서 싸울 힘이 자기에
겐 영 부족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려낸 창녀의 그 놀라운 '착한 심성'은 웃기지
도 않은 남자들과 세상의 폭력, 착취, 멸시에 대해 분한 마음으로 공격해봐야 소용
도 없음을 알고 체념에 체념, 수행에 수행을 거듭한 결과로 얻어진 일종의 득도의
경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치면 맞고 떠밀면 흘러가며
살자. 여기에서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건져낼 수 있다.
몸팔아 성불하세!
단적으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당하기만 하면서도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받아들이
는 창녀이어야만 여자는 성불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 생에서는 남자되어 태어
나소, 하는 불가의 윤회설에 기초한 체념설보다는 그래도 발전한 것인가? 더 나쁘
다. 도대체가 뭐하러 생리대는 있고 뭐하러 인터넷은 있단 말인가? 자기의 뜻대로
원하는 것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게 인생이라면 뭐하러 그 많은 것들을 만들고, 일을 하며 산단
말인가?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조차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과 행위로 실현해보지 못하
고 그저 수컷들의 상대로서만 무한히 자신의 몸을 대어주는게 정상적인 성이라면,
성이 그런 것이라면 난 수녀가 되고 말겠다. 아니, 칼을 들고 모든 강간범들의 거
시기를 잘라버리는 형벌을 내리는 떠돌이 사무라이가 되고 말겠다. (활동자금은
인터넷을 통해 모금하는게 좋을 듯하다.)
대체적으로, 티비드라마보다는 영화가 여자에 대해서 더 무지하다. 티비드라마는
여자들의 여가를 채워주는 오락물인데 반해 영화는 남성의 성적 환타지를 만족시
키는 역할을 하는 굳센 전통을 잊지 않기 때문이지 않은가 한다. 그래서, 한국영화
의 부흥을 얘기하고 젊은 감독들의 승승장구를 기대하려는 근간의 분위기에 대해
서, 나는 아주 냉소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여자에 대해서 저 정도의 심각한
착각과 새디즘적 환상만을 지닌 감독의 영화제를 하는 나라에서는 아직 바랄 수
있는게 없다고. 파렴치한들에게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2000.4.9
->37. 김기덕의 낚시줄에 걸려드는 '한국의 곱게 자란 남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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