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페미니스트보다 똑똑한 여자, 애나벨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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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되었던, [섹스: 애나벨 청 스토리]. 251명의 남자들과 릴레이섹스를
벌였다는 포르노스타의 다큐멘타리라... 별로 보고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누군
지 몰라도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은 들었다. 옛날에 대동강물을 팔았다던 봉이
김선달이가 또한 대대적으로 쳤던 사기이벤트에서의 그 대단한 기생도(그 이름은
생각이 안난다) 손님을 하룻밤에 열명 이상 받고나더니 '선달님은 사람도 아닌가
바' 하고 뻗었다는데,,,(뭐 픽션이라지만) 어떻게 연달아 251명이랑 하고도 멀쩡할
까? 그건 아직도 궁금하긴 하다. 영화를 직접 가서 보기 전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을테니... 별수없지, 포기하는 수밖에. 딱 한 가지 사소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돈들여 시간들여 감정을 낭비해가며 '알 만한 얘기'를 확인사살하긴 좀 그렇다. 사
실 그거 한 가지 빼고는 영화를 직접 보지 않아도 중요한건 다 알 수가 있었다.
인터뷰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주 멀쩡한 여자
영화잡지 키노 등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었던건 이 여자, 애나벨 청=그레이스는 아주 '멀쩡한 여자'라는 점이다. 신문에 떠억하고 난 [섹스: ...], 하는 광고나 251명과의 릴레이섹스! 라는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지나친', '미친' 짓거리가 아닐까 하는 느낌과는 좀 상관이 없는, 멀쩡하고 똑똑한 여자였던 것이다.
일간지의 소개글을 보면 과연 이 여자는 주체적으로 포르노스타가 된 것인가, 자기학대적인 몸부림으로 점철된 희생자일 뿐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라기보다는 기자의 의견을 던져놓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남자들의 견해는 일단 무시하고 가는게 하고 빠른 길이라는 생각으로 난 애나벨 청=그레이스 켁의 견해를 우선적으로 택하려한다. 이 여자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또 애나벨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함정은 무엇인지까지도 잘 알고 있다.
싱카폴 태생의 그레이스 켁은 91년 런던으로 유학가서 옥스퍼드 대학 내 킹스컬리지 법학과에서 공부했었는데, 그 시절 지하철에서 여러명의 남자들한테 집단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법이란 것에 대해 회의하게 되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인류학을 전공했고, 94년에 포르노 산업계로 뛰어들어 95년 <사상 최대의 갱뱅쇼>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에게 특징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이 여자가 '법이란 것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이말은 즉슨 이 여자는 매우 '정의'라는 것에 민감하다는 얘기다. 무엇이 진짜 올바른 건가?를 진정으로 물었기에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 '간격' '일반과 특수' 따위의 논리엔 넘어갈 수가 없었던 거다. 법제도가 규정하는 여성의 권리와 전혀 상관없이 실제로 통용되는 사회적인 남성의 성의식, 실질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난 그 마음을 알거 같은데 나도 역시 정의에 민감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가계 유전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탐구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발화된다. 10시간 동안 251명과의 릴레이 섹스!? 되도록 많은 남자와 한정된 시간에 섹스를 하는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그래서 섹스의 여왕이 되는 것이 남성들과 여성들의 성의식을 바꾸는데 얼마만한 공로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아무튼, 스스로 석사학위를 딴 엘리트 여성임을 내세우며 남들이 함부로 동양에서 온 '포르노비치'로 볼 수 없게끄름 연막을 치고 그 선정적인 숫자로 경이로움의 강도를 높인 것은 매우 똑똑한 수작이라고 생각된다. 남들의 눈을 확 끌며, 함부로 재단하고 넘어갈 수 없는,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는 껄끄러움과 쇼크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내가 봤을 때 애나벨 청은 일종의 한풀이를 한게 아닐까 생각된다. 인류학을 전공하면서 페미니즘 수업 시간에 그 극심한 페미니스트들의 오류에 열받아서 그렇다면 내가 뭔가 보여주지, 하고 포르노업계로 뛰어들은 그 여자의 '생리적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당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막힌 것은 풀어야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여자가 피해자라구? 웃기지 마라, 말로만 성의 주체가 되자 떠들면 뭐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섹슈얼리티를 무시하면서 어느 세월에? 좋은 집안 출신의 여자들이 깔작깔작 탁상공론을 거듭하는 꼴이 한심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스스로가 극심한 폭력을 당한적이 있기에 대책없는 '피해담론'의 무능함, 해악에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던 거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런 고통을 겪고나서 충분히,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한 가지 방법으로 '지나친' '자기학대적인' 사이코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다. 정상적 상태에서는 지나친 것이 비정상이다. 그러나 아픈 상태에서는 지나친 것이 정상이며 치유를 위해서는 다른 지나친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에 오로지 자기 하나만의 무참한 짓밟힘으로 끝난 (가해자 남자들의) 강간과 (법과 사회의) 강간사건에 대해 냉정하게 뒤돌아보며 오로지 현재의 포르노스타로서의 가치에만 신경쓰는 여자가 있다면, 무지 무서울 것 같다. 시간의 간격이라는 것도 있고, 개인마다 증세와 체질이 다르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레이스 켁이란 여자의 성격에는 이것이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화두가 된 것이다.
일단 개인적인 한풀이 자체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다큐 작가란 변변치 못한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섹스: 애나벨 청 스토리]가 풍긴다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여자의 자기학대'의 냄새는 몇가지 정황을 들어볼 때 자기해석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감독의 '윤색'의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자기가 먼저 자해를 해 놓고 그와 공감을 하기위해 같이 자해한 그레이스의 영상만을 담는다든지, 무엇보다도 자기와 연인사이라는걸 영화에서 드러내놓을 수 없다고 하는 '감독관'을 보면 분명해진다. (영화를 직접 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의 판단은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여자는 그 한풀이를 일회성으로 하고 마는게 아니라 자기의 물음을 밀고 나가는, 그 답을 찾아나가는 방편으로서 해냈다는 점에서 훌륭하고,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행위로써 논쟁을 일으키고, 남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대하다. 분노한다고, 열받는다고 다 이렇게 걸판진 한풀이 하는거 아닌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자를 대상으로 만든다
여자는 '당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보호'를 하자고 나서기 시작하면 여성은 언제까지나 성에서 소외당한 채 보호받아야/격리당해야 한다. 남성들의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고 남성들의 언어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남성들의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여성은 언제까지나 어른 취급을 못 받고 어린이나 노약자, 미성년자와 함께 취급되는, 행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점에서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삽질을 계속하고 있다. 그레이스 켁의 지적대로,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경향은 이상화된 여성상을 고수하며, 여성은 마치 '무성적' 존재인양 상정된다. 여성은 학대받으면 안 되며, 여러 남자에게 '공유'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존중받는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언제나 '인격적'인 인물로서 남아있어야 하며 대중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건 솔직히 말해 위험한 짓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어디에서 찾아야하는가? '누군가가' 욕망을 불러일으켜주지 않는 성성이란게 있기는 한건가? 분명한 답변은, 그 이상적인 (모든 폭력으로부터의 절연상태라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건 로맨스물의 이데올로기 정도일 것이다. 미국에서 만드는 로맨스영화가 기반하고 있는 '좋은 성'이란 서로에게 충실하고, 모든걸 대화로 풀어야 하며, 남자는 여자를 아끼고 위해주어야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잘 살 수 있다, 는 것이다. 남자의 '자애로움'은 사회가 부과한 불공정한 성역할 분담을 그나마 완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나온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모두인가? 토닥토닥 타오르는 난로가에 촛불과 와인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없는 성이 그냥 탄생하는 것인가? 에 대해선 할리퀸 출판사는 '대대적인 여성들의 지지'라는 숫자만을 제시할 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장해야할 권리는 '보호받을' 권리가 아니다. 직장상사로부터, 길가는 미친놈으로부터,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이웃들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더 급하다. 물론 범사회적인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법적 제도적 방비책을 충분히 마련해야겠지만, 아무리 법의 영역을 늘려간다한들 '보호는 불가능'하다. 길을 오가는 개인들 뇌리에 박힌 심리적 영상, 즉 감수성의 영역에서 승리를 거두어야만 여자의 지위는 높아질 수 있다.
이 섹슈얼리티는 개인적이며 다양한 것이다. 그레이스 켁의 말대로 각기 개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고 발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각각의 여성들은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자기만의 성의식을 형성하며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어떤 여자는 '남자들 정말 열받아' 하면서 공격적일 수 있고 또 어떤 여자는 '세상 편하게 살아서' 온세상을 장미빛으로 칠하며 공주일 수 있다. 그 많고 많은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 하는 가름을 미리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
이 논리는 물론 남성들 각각의 개성적인 섹슈얼리티에도 해당될 것이다. 남성의 성적 억압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범죄의 근본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성은 철저하게 자신의 성적 표현을 제거당하기 때문에, 오로지 여성의 소유하는 것으로써만 성적 욕구를 채울 수 있고, 성을 가질 수 있다. 게이와 여장남자, 성전환자에 대한(심지어 많이 꾸미는 남자들한테까지도 향하는) 남자들의 경멸과 혐오는 곧 자기네 결사조직의 배신자에 대한 이지메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은 단지 성을 살 수만 있고 소비할 수만 있지 스스로가 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의 능력을, 남성다움을 증명하기만 해야한다는 굴레에 묶여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칼럼 하나를 쓰겠다.)
비난을 하는게 아니라 힘을 갖기를 원한다
애나벨 청이 왜 남자는 수많은 여자들을 따먹으면 플레이보이 영웅이 되는데 여자는 수많은 남자들과 하면 개년이 되냐, 여자도 훌륭한 섹스의 여왕이 될 수 있다! 고 받아치는 것은 하나의 안티액션으로 훌륭한 시도라고 본다. 물론, 여기서 여러 남자를 따먹는 여자는 많은 남자들의 시선에 의해 잡년 혹은 벌통으로 격하되어 다 쓰고 꾸깃꾸깃 버리는 휴지 같은 존재로 취급될 가능성은 다 봉쇄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쪽에선 그래도 또 한쪽에선 안 그렇다. 이것은 힘의 논리다. 스타라는건, 자기 모습으로 화면을 꽉 채우면서 욕망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존재이며, 선망의 대상으로서 자기를 향한 시선들을 힘으로써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 힘은 당연 기존의 코드에 편승하여 얻어진 것이다. 기존의 코드에 의존하면서 그것을 깨는 방법으로써만이, 애나벨 청이라는 특이한 인물은 가능할 것이다. 포르노 스타로서, 자기 이미지가 오로지 오리엔탈 독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함정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양인들의 막강한 엑조티즘, 동양 여성에 대한 관음증에 대항하기 위해 '차라리 컬리지 걸로서 팔리길 원한다'. 컬리지 걸의 이미지로서 오리엔탈리즘의 코드로만 해석되는 위험을 없애며, '신비스럽고 순종적인' 아시아 여성의 환상적 이미지를 깨는 노력을 해왔다.
물론 존중확보라는 점에서 그 여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피해자, 희생자로서 앉아서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그레이스의 주장은 바로 내가 하고싶은 말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여자들은 자신을 남성지배사회의 희생물로서 분개하고, 슬퍼하고, 한탄하고, 자위하다 그칠것인가? 그러다가 속끓여 죽거나 아니면 분노를 하루 빨리 잊고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여자들쪽으로 넘어가서야만 살아남는 건가? 왜 똑똑한 여자들은 그렇게 멍청한가? 왜 속수무책으로 개인적 패배만을 반복하는 여성사에 제대로 끼어들지를 못하는가? 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가진 힘을 제대로 쓰도록 촉발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여자들의 분노를 조금 자극하여 책만 팔아먹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비난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네들이 남성들에 퍼붓는 바로 그 '비난' 말이다. 성의 자유는 주장하지만 잡년으로 취급되는 것은 남편에게 미안한 일이며, 매맞는 여성은 동정하지만 스스로의 매저키즘은 내놓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스스로가 사회도덕적으로 문제없는 여자이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위선자로 만든다고 본다.
상당한 지위의 보수주의 기득권층일 뿐인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아닌 서구의 좌파나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이라도, 자기네가 부정해야하는 사회적 가치, 윤리 안에서 스스로가 평가받는걸 의식하고 움추려들며, 또 반대로 자기네의 이론에 걸맞는 진보적인? 섹슈얼리티를 내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말 않고 단지 '입바른 소리'인 평등만을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전체적인 상황인거 같다.
(남성 자체를 거부하느라 레즈비어니즘으로 가는 전투적 페미니즘은 정말 대단하지만, 바보같다.)
스스로 컬리지 걸로서, 좋은 교육받고 잘 자란 양가집 규수로서 포르노 배우가 됨으로써, '좋은 여자/잡년'의 이분법에 대한 도전하는 그레이스 켁의 시도는 우선 그 용기만으로도 높이 살만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제의 정곡을 꿰뚫고 있다. 이 여자는 아주 똑똑하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헛다리짚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정확히 집어낸다.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여성성?
여자는 아무데서도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을 자기것으로 할 수 없다. 어디서 존재하지도 않는 '공정하고 정상적인 성'을 타올 수 없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스스로 약탈당하고 억압당한 역사를 가진 만큼, 그 사람은 그 고통이 아로새겨진 자기 감수성으로서만 즐거움도 기쁨도, 욕망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저키즘의 '치유적 성격'이란게 바로 이런 것이다. 평소엔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다녀야 한다. 바보같이 당할게 아니라 기는 기고 아닌건 아니고, 제대로 대접받고 살기 위해 특히나 여자들은 다각적으로 애를 써야한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감수성을 무시한 성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시절 혹은 청소년 시절 티비를 통해 영화를 통해 만화를 통해 젖어들은 성의식, 가까이서 본 부모나 어른들의 성역할 모델, 이런것들과 상관없는 성애란 존재할 수 없다.
자기가 안고있는 '그것들'에 대해서 머리가 굵어지면서 반발할 수도 있고, 자기 삶에 변화를 일으켜 거기서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에 '대하여' 자신은 늘 어떤 행위를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이룬 과거의 기반이란 인생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또한 그 극복한 삶과 의식마저 과거로 지나가면서야 멀어질 수 있다.
섹슈얼리티는 따라서 늘 경과하는 것, 지나가고 흘러가는 것이다. 애나벨 청은 앞으로 아마 다시는 그렇게 지나칠 정도의 자기학대성을 보이는 이벤트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마돈나는 80년대 선보였던 유치찬란하고 얄팍한 섹스심볼 여가수의 섹슈얼리티를 젊은 날의 치기로 치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의미가 있었다. 지금도 어떤 여자들에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죄책감과 피해의식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류의 수준은 '죄책감에 물든 성'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좀 벗어나 봐야 그것에 반발하느라 '도착적으로 광분하는 성' 정도이다. 사회적 의식은 남성적 주체이며, 그 시선이 탐욕스럽게 훑어야 하는게 여성이란 대상이다. 그 탐욕은 죄다. 웃기는 기독교 윤리에 따라. 죄책감은 이면의 공격과 복수를 낳는다. 자신에게 부당한 죄책감을 부과한 것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엄청난 성범죄들은 그 나라의 별난 청교도주의와 성의 상품화문화의 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고 난 본다.
여성은 이에 더하여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갖은 성차별과 강간의 위협 등속에 노출되기 때문에 많든적든 피해의식을 가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개방적인 성윤리가 확산됨에 따라 피해의식은 줄어들지만, 죄책감에 피해의식까지, 그걸 넘어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열망까지, 배반하는 여러 감정들을 챙기는 분열적인 상황에 놓인다. 여성은 성공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남성적 시선으로 때에 따라서는 여성의 육체로 변신을 거듭하는 스파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런 부자유는 우리 인성형성의 시작부터 달라붙어 전생애에(?) 걸쳐 온세계에 널리 퍼져있다.
죄책감 없는 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우리 몸의 욕망, 자연스러운 우리 감각의 표현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주변의 닥달을 뒤로 하고 죄책감 없는, 즉 맺힌 데 없는 성을 추구한다는 것도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몸이 따르기는 언제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죄책감 없는 성에 대해서 89년 이후 줄창 주장해오던 마광수 교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즉 거짓이 가식이 없을것과 이에 따라 꽃피는 상상력의 즐거운 몽상을 얘기한다. 멋진 주장이다. 그러나 애나벨 청은 곧장 그 길로 가는 대신 다른 과정을 밟고 있고, 많은 여성들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워낙 당하고 산게 많아서 말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쾌락이어야 하지만.
애나벨 청의 갱뱅쇼는 피해의식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여성의 살풀이 과정이다. 벗어나 힘을 획득하고, 진짜 쾌락으로 나가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 그 다큐멘타리가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그레이스 켁이 '다큐멘타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만들것이라고 하니 좀더 괜찮은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 감독은 보상을 하려한다
남성이라는 족속은 대체적으로 여성 위에 군림하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무생각 없이 여성을 착취하고, 여성을 한낱 성의 노리개로 갖고 놀고자 할 뿐이라는 식으로 페미니즘은 남성을 이상화한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있는 남자들이란 대개 자기 여자한테 멋지고 능력있어 보이지 못하면 어쩌나 고심하고, 여자들이 알록달록 화사하게 자신을 꾸미고있을 때 오직 그 비용이나 대주고 에스코트나 해주는게 보람인 자기 처지에 대해서는 분노조차 못한 채 자신의 성적 표현을 거세당하고 사는 불쌍한 족속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남성은 '남성전체'가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자기 개인이라도 '보상'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최고로 불쌍한 종족이다. 이 다큐를 만든 감독 고프 루이스도 역시 그 과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죄책감을 갖고 있으며 애나벨을 희생자로서 바라보는 것을 끝까지 멈추지 못한다.
그걸 알 수 있는 건 애나벨 청의 뒤를 이어 갱뱅쇼에 도전한 자스민을 '멍청하고 어리석은 잡년'으로 그린 사실에서다. 그레이스는 자스민이 '멍청한 여자'와는 거리가 먼, 자기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을 방법에 대해 잘 알고있는, 즉 사업가기질인 경제학 전공자라고 말한다. 자스민이란 여자가 성공을 거둘지 실패를 거듭할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가능성과 올바른 태도를 그레이스는 보고 고프 루이스는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레이스의 말대로, 감독은 포르노업계의 여자들에 대해 어디까지나 희생양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걸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여자가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기 이미지를 내놓고서 얻고자 하는 걸 얻으려는 주체적인 태도 자체를 자기 개념 속에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러다 어쩔려구 그래... 정도랄까. 여러가지 점에서 그 감독은 영화의 일관성을 위해, 즉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 진실을 희생한게 아닐까 의심된다.
포르노는 여성화될 수 있을까?
그레이스가 포르노업계에 뛰어든 이유는 페미니즘 수업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 셈이다. 그동안의 활동, 갱뱅쇼와 다큐멘타리로 인해 얻은 유명세를 바탕으로 배우뿐 아니라 감독, 제작을 하여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포르노를 만들고자 하는게 그의 앞으로의 계획이다.
난 개인적으로 여성의 시점에서 만든 멋진 포르노 볼 날이 과연 올지 의심하는 편이었지만, 애나벨의 시도가 중요하며, 맞는 길이라고 지지해주고 싶다. 포르노 시장에서 수요의 30 퍼센트를 차지하는 게 여성이라고 한다. 진작에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나와야했건만, 기존 포르노업자들은 돈버는데만 급급해서, 페미니스트들은 '경건주의'로 일색하느라 아무도 건드리질 않았다.
좋든 나쁘든, 사춘기 시절 몰래몰래 본 포르노를 통해서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은 성을 배운다. 많은 한국 여성들은 포르노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그렇더라해도 크건작건 영향을 받은 남성들과 함께 실전에 돌입해야 한다.
여성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남성적 시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르노는 좀더 심하다. 일상적인 수준과는 비교가 안된다. 일단, 옷을 다 벗고 치명적인? 지점마저 다 노출하며 오로지 섹스머신인양 여성들은 묘사된다. 여성을 상품화하지 마라, 물건취급 하지 마라,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몸속 어두운 곳의 성의식이 그렇게 박혀 버린 이상은 애써도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애나벨 청과 그 뒤를 잇는 여성을 위한 포르노의 시도들이 제대로 뭔가를 이루었으면 한다. 그 판세가 바뀌면 참 재미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다 드러내며 아무도 얘기 못 하던 성의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그 여자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파이팅! 해주고 싶다. 미친년 소리 들어도, 지 얼굴에 먹칠하는 년 소리 들어도 꿋꿋하게 밀고나가서, 꼭 주체적이고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으면 좋겠다. 남이야 남이고, 쾌락은 자기꺼니까.
20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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