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들은 '무엇 대신' 동물해방을 주장하는가? -죄책감의 기술, [동물해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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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구 위의 모든 털들'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임.
피터 싱어 Peter Singer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1999, 인간사랑)
-1975년작. 동물해방론의 성경과도 같은 책이라 함.
하지만 안 봐도 이 글 읽는 데 지장없음.
먼저 겉으로는 이 책과는 별상관없어 보일지 모르는 얘기부터 하나 꺼내보자. 예전에 순독일제 한국인 이한우씨가 어느 티비프로그램에 나와서 한국에도 미국의
흑인들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 한 일이 있었다. 아니, 한국에 인종차별이? 워낙에 외국인이 없이 우리끼리 사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그가 지목한 것은
여성이었다.
생각해보면 여성들은 정말 지독스러운 차별을 받으며 일생을 산다. 한국 여자들은 특히나 엄청난 가부장제도에 얽혀 고생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비유였지만,
말이 되는 얘기다. 그러나, 그 깨달음 중에도 난 분명히 기분 나빴다.
기분나빴다는 것은, 이 잘난 나를 흑인들과 비교해서 기분이 나쁘셨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흑인차별의식이 있다는 얘기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앞으론 정신
차리자, 하고 다짐해보지만.. 어쨋거나 나의 흑인차별의식은 대개 미국영화들을 보면서 형성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본 많은 영화들과 티비시리즈들에서는 좋은애, 나
쁜애, 띨띨한 애, 잘난 애, 외로운 애, 감싸주는 애들은 모두 백인이고, 흑인은 언제나 '흑인'으로 나왔다. 혹은 흑인 깡패나 거지, 노예로.
그러니 나라고 하는 개인에게 무조건 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 다수가 흑인에 대해 품고있는 인종차별 의식,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뉴소
중화주의(new小中化주의: 전통적인 흠모의 대상인 한나라(중국) 대신 새로이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미합중국을 섬기며 큰형 밑의 둘째자리로 자존심을 만족하며 다
른 민족을 깔보는 의식)에 대한 공격에서는 피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위의 사건에서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전세계적으로 여자의 처지가 흑인이 받는 인종차별보다 전혀 나을게 없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스스로 비
교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선 기분 나빴던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차별하는 사회 속에서 그렇게 키우고 길러진 남성들에게 무조건 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는 셈이 되는가? 그건 그렇다. 그래서 많은 가정
교육 잘 받은 백인남성들이 평소에는 늘상 신사적으로 행동하다가도 [사우스파크]의 주메뉴인 '스스럼 없는 여성격하'에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는 걸꺼다. 그렇
지만, 눈앞에 보이는 불합리와 치졸함들에 대해 전혀 생각없이 살은 건 물론 자기 책임이다. 흑인차별에 둔감한 여자도, 여성차별에 둔감한 남자도 무조건적인 비난
을 들을 순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종차별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죄책감 역시 대부분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의 얘기 이상으로 특별히 입증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동의해주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양심도 지각도 없는 사람이 이 칼럼을
찾아읽기까지 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고, 흑인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차별엔 분노를 느끼고, 반대로 나 자신의 흑인 차별의식엔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흑인이 이 글을 읽으면 또 반응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좀 배운 서양인들은 자기네가 유럽의 식민지 강탈기간 동안 다른 인종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노예화한 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
낀다. 그리고 또 비슷한 이유로, 노동자들과 여성들을 비인간적인 노동에 혹사시킨 과거에 대해 오늘날 서구의 남성지식인들은 많이들 죄책감을 느낀다.
최근 유행하는 현각스님의 [만행]을 난 감명깊게 읽었는데, 가장 부강한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난 수재인 그가 끊임없이 눈에 들어
오는 삶의 진실들을 마주해 느낀 죄책감에 대해서는, 그저 긍정만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독재정권을 후원해주는 중남미 국가 농장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싸고 질좋은 과일들이 풍성한 나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지옥같은 삶을 바탕으로 활짝 피어난 이 부자나라의 행복한 삶. 이것은 아니었다. (사
람의 도리가) 그러나 이 사람 개인으로서는 진정으로 자기의 마음을 울리는 대로 따라간 것이겠지만, '죄책감에서 기반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난 일단 의심의 눈초
리를 거둘 수 없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동물해방]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명제 하에, 인간이 자기네 종이 아닌 다른 종들(짐승)에 대해 갖고 있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대해 죄
책감을 느끼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권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원칙을 무시하고 흑인차별을 한것에서 죄책감을 느끼듯이 동물평등의 원칙을 차마
알지 못하고 소나 닭을 차별한 것에서 죄책감을 느껴라, 그런게 되겠다.
이 어처구니 없는 궤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는 다음의 전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왜냐면 고통과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생물은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식물이 피를 흘리지 않
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눈앞의 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이유로 동정한다. 특히 동물은 그 고통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하다. 그중에서도 빨간 피를 흘리는 동물의
모습은 우리 속의 두려움과 동정심을 자극한다. 식물이야 스트레스를 받건 죽건 관심없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궤변은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이
야기는 진행된다. 그 일반인이란 일요일마다 교회는 가지 않을지 몰라도 신을 믿고 교적에 올라가있고 교회나 성당에서 결혼을 하고 장례를 치루는 백인 중산층,
동성애는 하느님이 주신 천성을 거역한 것이며 애완견은 가족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고 있는 '상식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식이 있기 때문에 자기네가 당연시 여기던 동물차별 의식에 대해 깨우침을 받아들이고, 부끄러워 할 줄 아며,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에도 참
가할 수 있다. [동물해방]을 읽다보면 구구절절이 동정심과 분노를 자극하는 동물들의 처참한 실상이 이어진다. 쓸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실험을 위해 희생되
는 쥐들, 원숭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듣다보면, 내가 인간인게 민망할 정도이다. 예쁜 분홍색을 내기 위해 일부러 빈혈에 걸리도록 하여 가두어 키우는 비일
송아지 얘길 보다보면, 미식가들의 식도락이란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몹시 회의가 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와 유제품을 만들기까지 동물들이 겪는 학대
와 스트레스 만빵의 일생을 들어보면 인간들이 정말이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의 동정과 분노의 감정과, 그 동물들의 고통과, 문제의 평등권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 평등권이란 단 하나의 전제로서 절대명제화되어 있다. 여기에 쉽사리 동조하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온건한 주장부터 시작해서 (결과
적으로는) 자기 전제에 근거한 최대한의 결론으로 몰아간다. 먼저 필요없는 고통은 줄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로 시작해서 산업화 사회에서 동물권을 존중받고 살다 도
살된 동물의 고기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육식을 하지 말자로 교묘히 옮아간다. [동물해방]은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동정심과 분노를 끊임
없이 죄책감으로 변환시켜, 결과적으로 같은 결론을 얻음으로써 자기 논리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방점은 고통에 찍혀있다. 온통 고통에 관한 보고서다. 아기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놓고 가짜악질어미를 만들어 괴롭히는 실험이 인간의 정신병리적인 연구에 얼마
나 도움이 될 것인가? 이 모든 비극적 코메디는 동물실험이 대부분 별쓸모없고, 그저 연구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한 효용밖에 채워주질 못하는, 인간의 무식한 과
학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인간한테 효과가 어떨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른 동물들한테 실험을 해보는 건 역시 재고를 해봐야 한다. 같은 종인 인간
안에서도 체질에 따라 독이 되는 것과 약이 되는 것이 저마다 다른데, 아예 다른 종을 갖다 놓고 실험을 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가 있을 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점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재고와 혁신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의 채식주의 이데올로기가 집단적으로 자극하는 '죄책감의 기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동물해방]은 고문기술
자 이상으로 세련되고, 더 솔직하게 죄책감의 기술을 발휘한다. 동물해방이라는 목적을 위해선 인간의 감정을 그릇된 방식으로 오용해도 좋단 말인가? 아니다. 우리
는 '사실'을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안에, 지구 위에 붙어살고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위치와 힘을, 즉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계 전체와의 관계
에서 문제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조건 평등하다라니.. 말이 되질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우선 인간과 같은 종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모든 종은 일단 자신의 번성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인간의 인간이기주의는 그렇게 나
쁜 것이 아니다. 그게 지나쳐서 다른 생물들과 환경을 다 망가뜨리고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면 그건 정말 문제일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
는 것? 식물도 느낀다. 그렇다면 왜 식물에 대해선 죄책감을 갖지 않나? 뇌가 달려있어서 전문적으로 정신활동을 벌이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권리인 것인가? 논점
이 잘못되었다.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당위나 죄책감 따위로는 정립할 수 없는, 본연의 자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평등하다, DNA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식물의 권리를 얘기하면 어쩔 것인가? 농담이 아니라 벌써 서양에는 채식도 아니고 과일만 먹는 그런 연유로 요새는 식물도 감히 해칠 수 없어 알아서 가
지에서 떨어진 과일만 먹는다는 프루테리언이 등장했다.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로맨틱 코메디 [노팅힐]에 보면 휴 그랜트가 줄리아 로버츠와 헤어진
후 수많은 여자들과 소개팅을 하는데, 그중 한 여자가 프루테리언(과식주의자?)이다. 식물도 고통과 쾌락을 갖고 자기 삶이 있으니 차마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스
로 떨어진 과일만 먹는다. 이 코믹한 주의주장은 그저 농담으로 잠깐 나오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식물을 먹을 수 있는건 그들의 몸이 우리꺼랑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탄수화물은 탄수화물, 단백질은 단백질이다. 여기엔 어떠한 성스
러운 승화의 과정도 없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생물인 것이고, 먹고 싸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있는 것이며, 다른 동물과 식물, 균류에게 의존하고 있는 '종
속적 존재'인 것이다. 특히나 식물이나 조류처럼 자가영양을 할 수 없고, 다른 동식물 균류를 먹어치는 방법으로서만 살 수 있는 종속영양체이다. 따라서 고마와해
야할지, 그냥 당연하게 여길지는 알아서들 하시라. 암튼 지구 위의 탄소를 기조로한 생명체들은 당연 모두 몸이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버섯이든 먹고, 힘을 낼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고매하고 성스러운 어떤 존재인양 자기존재를 각색하고, 과학이 발달해서 인류도 아메바에서 시작하
여 오늘날로 이어졌음을 밝혀줘도 끝끝내 그래도 진화의 가장 윗대가리에 놓인다느니, 정신의 차원은 감히 다른 동물과는 비교도 안 된다느니 하고 자위성 학문을
계속 해댄다. 이것은 서구의 특유한 성격인데, 이미 자본주의를 타고 전세계를 점령해 버렸다.
동물해방론은 그 각색에 전혀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각색을 조금 확장할 뿐인 것이다. 동물이 고통과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과 평등하다라는 주장
은 바로 그 선입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을 지녔기 때문에 우월하다. '뇌가 달려있기 때문에 고차원적 존재다' 라는 것. 즉 동물해방론의 뒤에는 서구의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믿는 존재이기에 성스럽고, 우월하다' 는 선입관이 세속화하여 '고통과 즐거움의 감정을 갖는 동물은 인간과 같이 취급
될 수 있다' 는 추가항목을 맞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은 평등하다' 란 말은 다음의 말로 정확하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주제는 결국 그것이다. [동물해방]이 동정과 관심, 죄책감을 호소한 '일반적인 서구인'에게 어필하는 기본 요건은 이것인 것이다. 공정성과 합리성을 가장하기 위해
교묘히 그 말은 피해갔지만, 근본에 깔린 것은 분명하다.
(뇌중심주의와 정신우월주의는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어가자면 플라톤을 거쳐 인도까지 가야할 거 같은데, 아쉽게도 아직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일단, 문제를 일으
키곤 하는 서구인들의 틀거리는 기독교에 근거하니 그것만을 말할 뿐이다.)
식민지 약탈과 동물해방론의 공통근거는?
답은 역시 기독교다. 아메리카 대륙의 토박이들이 자기네 질투많은 유일신 야훼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놈들은 야만인이니 다 죽여도 좋고 약탈해도 노예를 만
들어도 좋다, 고 믿었던 해적시대 식민지 개척자들과 아주 똑같은 선입관을 동물해방론은 자기 근원에 갖고 있다. '하느님 앞에' 라는 진리다.
그 시절 서양놈들의 논리 안에선 인간은 신을 믿음으로써 성스러운 존재, 문명인이 되며, 따라서 신을 믿지 않는 야만인들은 짐승과도 같은 존재로서 사냥하고 사
고팔고 학대해도 상관없었다. 그 과거가 만들어놓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약탈과 착취, 불평등에 대해서는 한마디 않은 채, 20세기 동물해방론자들은 동물을 학대하는
특히나 특정 동물을(돌고래라든가 개) 학대, 학살하는 나라와 민족에 대해 공격한다.
이건, 왠지 인권문제와 닮지 않았는가? 미국이 자국의 힘 아래 제3세계를 복종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잘 써먹는 레파토리가 인권문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여기
서 정신이 버쩍 날 수밖에 없다. 인권문제랍시고 남의 나라 주권을 뭉개고 심지어 무력개입하는 걸 정당화하곤 하는 미국의 논리와, 고래를 먹던 개고기를 먹던간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것을, 단지 자기네와 다를뿐인 남의 문화권 식습관을 가지고 서구인들이 동물보호를 떠들어대는 것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즉 어느 쪽이나
제국주의의 냄새가 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남획을 해서 씨가 마를 지경이니 고래를 먹지 말자는 논리에 대해서는 만화 [맛의 달인]이 충분한 대답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만화가 좀 오래된 것이라 그동
안 달라진 상황도 있을 텐데,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다. 고래도 하나가 아니라 당연 종류가 엄청난데, 그동안의 보호로 인해 오히려 늘고 있는 고래도 많다는 것이다.
고래요리 역시 문화인데 정당하게 인정받는게 당연할 것이다. 개고기 역시 말할 거 없다. 당연히, 체질이 맞는 사람은 먹고 잘 살아야하는 것이다. 자기네가 키우
는 애완견을 가족같이 여긴다고 해서, 남이 대충 막 키운 똥개를 잡아먹거나 남이 자식처럼 키운 소나 돼지를 잡아먹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물론 내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하는 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기지촌여성들도 다 우리 누이인데(언니나 엄마나 나 자신이 아니다. 꼭 누이다. 그게 자
기가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범위인가 보다. 정말 재수없는 놈들이다) 양놈들한테 유린당하게 내버려둬서 되겠냐는 유치한 민족주의자들의 헛소리를 하는 중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제국주의나 영국 제국주의 못지 않게 지금은 미국 제국주의의 논리가 전세계 자본주의 사회에 통하는 중인 것이다. 미
국의 부강한 기업들과 농민들과 담배회사들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오늘도 무데기로 희생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자본주의의 특성일 뿐이며 미국 제국주의라는 것을 과연 오늘날도 말할 수 있겠냐는 반론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최초에, 약탈 위에서만 잉여는 존재했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제도와 무력이 가동되는 것은 오로지 기득권의 이득을 위해서인 것이다. 현재 미국이
산업과 사회와 문화, 자본주의사회 전방면에 걸쳐 작용하고 있는 역할은 분명 제국주의적이다. 최소한 미국이란 덩어리의 '국가권력적 부위'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
견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왜 20퍼센트나 되는 채식주의자들은 미국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는건가?
전에 아마도 mbc에서 '음식대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오랜만에 궁금했던 얘기를 들어볼 좋은 기회였다. 내용은 미국 채식주의자들한테서 한국음식이 아
주 인기 높다는 사실, 한국은 벼농사에다 불교문화권의 특성으로 인해 채식주의에도 다이어트에도 아주 수준 높고 풍성한 식단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도
보급은 저조한데) 세계 속으로 한국음식이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등등의 것이었다. 나에게 정말로 놀라웠던 것은 미국 사람 다섯 중 하나가 채식주의라는 얘
기였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이미 20퍼센트나 장악을 했는데도 채식주의는 미국인들의 음식윤리와 생태계에 대한 인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지 못한
단 말인가? 채식주의자들은 다 바보인가? 미국 지식층들은 다 쭉정이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선 역시 기독교에 혐의를 두는게 좋겠지 않을까나...
역시, 그들의 채식 '주의'가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양식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몸으로 인식하고 지구생태계 속에 제대로
위치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또다른 생명들로 끊임없이 이어진 흐름은 보지 못하고 한 개체의 생명, 피흘리는 생명, 뇌(정신)가 달린 동물의 권리만을 당위
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단지 죄책감에 기초하여 '행위'할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몸은 그대로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 남은 채.
서구의 채식주의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과 또 그와 이어진 더 큰 세계에 관심이 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
일텐데,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그것은 그들의 채식주의가 동물에 대한 동정심, 피에 대한 혐오감만을 발작적으로 자극하고 끌어낼 뿐, 인류가 이 지구생태계 안
에서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 패러다임은 '동물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는 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감한' 자들이나,
'이끌어가는' 자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잘 산다는 나라 미국에서도 채식주의를 할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계층은 한정되어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으면 비싼 채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라는
고기가 휠씬 싸다. 고기가 서민의 음식이다. 채식주의는 어디까지나 지식층과 부유한 중산층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1950년대 이후 미국엔 불교가 단계별로 '대대적'
이라 할만한 유행을 하고있는데, 그 바람이 불고있는 계층 역시 다르지 않다. 채식주의는 자기의 죄책감을 달래고, 스스로 금욕으로 인한 즐거움을 얻기 위한 정신
적 자위랄까 대체종교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보인다. 즉 정신적 우월감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적인 것이 지구를 구원한다?
서구에 불고있는 불교의 유행이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인것처럼 보이면서도 위험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그들이 인도의 불교를 중국의 도교로 한번 걸러 받아들인 동양인의 불교와는 상당히 다르게, 인도 원산의 강직함을 더 강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실체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바람 속에 떠도는 이야기와 이미지만으로 판단하는 것이라 좀 막막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여전히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몸과 지구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온전할 것이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 것이다.
몸과 지구생태계에 대한 인식전환은 중요한 문제다. 이미 인간은 핵폭탄으로 지구를 날려버릴 능력을 넘어서서 유전자해독과 전지구적 네트워크 건설을 향해 가고있다. 이것을 낳은 건 서구문명이지만, 과학기술이 가져올 그 엄청난 삶의 변화에 대해 대처하고 이끌어갈 변변한 윤리를 그들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대처방안으로 환경운동과 녹색물결이 일어서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신 앞에) 인간과 그 대상인 자연이라는 패러다임을 가지고서는 해결의 기미가 없다. 가이아론은 아직까지는, 촌스럽다. 제대로 동양정신이 그 에센스가 발휘해서 인류사의 중대한 대목을 잘 이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길이 어디로 올지 아직은 나도 감을 못 잡겠다.
이미 환경 이데올로기는 전지구를 장악할 타임이 되었다. 지금 한국에도 환경론, 녹색이데올로기가 제대로 된 시민운동으로는 벌어진 적 없어도 이미 권력체로서는 드러나 있다는거 아닌가. (이번 총선 시민낙천운동의 본거지였던 녹색연합의 회장이었던 장원이란 자의 성추행사건에서, 딱 그 수준을 묘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앞서서 최신 지구생태계 윤리를 제공해야 할 곳이 이 모양이니 정말 끕끕한 노릇이다. (다른 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권도원 박사가 창시한 8체질론에 따르면 금양체질에 속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생선과 채소를 많이 먹어야 건강하다는 얘기다. 한국의 한의학계는 대체적으로 사상체질을 따르는데, 8체질론은 이와는 엄연히 다르다. 8체질론은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8가지 체질이 있다고 보는데, 그 체질은 심장, 폐장, 췌장, 간장, 신장, 소장, 대장, 위, 담낭, 방광, 자율신경의 교감신경, 부교감신경의 12기관의 기능적인 강약배열에 따라서 형성된다. 이에 따르면 목양체질과 목음체질은 고기를 먹으면 건강하나 생선과 채식을 좋아하면 몸이 약해지고 병이 생긴다. 반대로 금양체질과 금음체질은 생선과 채식으로는 튼튼하나 고기를 좋아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좀더 자세한 얘기는 8체질론 홈페이지로)
아직 내가 8체질론을 공부했거나 임상경험을 통해 확신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소개한 것은, 동물해방론의 고기논쟁에 대해 가장 높은 곳에서 직격탄을 쏘아주는 한의학의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고기를 먹는 것은 윤리문제이기 이전에, 체질과 건강의 문제인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 식문화는 고기와 금욕, 살생과 채식주의의 논쟁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아시아 벼농사문화권답게, 쌀을 주식으로 해서 곡류에서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힘을 내고, 고기는 잘게잘게 찢어진 상태로 조금, 보충식 정도로 한다. 다양한 채식과 아울러 살뜰한 고기활용 음식이 발달했다. 이와 반대로 서구의 식문화는 가축을 상당히 많이 키워서 우유나 유제품,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고 힘을 낸다.
산업화가 축산과 도축의 대량화를 촉진하고, 전반적인 소득수준의 향상과 함께, 고기는 서양에서나 아시아에서나 문제거리가 되었다. 못 살 땐 그나마 가난이 막아주던 것을, 잘 살게 되니 무조건 '잘' 먹어서 각종 성인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채식을 소리높여서 모조리 채식을 한다고 성인병이 없어지고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기든 채소는 나름대로 효용이 있는 것이고, 체질마다 적합한 식단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건강법이 자기 체질에 적합하다고 해서 남들한테도 다 좋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인데, 이 나라는 잊어버릴 만하면 유행처럼 '뭐가 좋다더라~'가 떠돈다. 물론 이것은 불쌍하고 가여운 동물들을 죽여서 고기를 먹다니.. 야만인들.. 하는 엉뚱한 윤리적인 차원의 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그나마 나은 차원이라고는 할 수 있다.
서구의 동물해방론과 채식주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편협한 인간관과 윤리관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안에서는 건강은 물론이고 지구를 구원할 방법이 없으니, 자기자신과 지구생태계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과 실천을 위해서는 화통한 동양철학을 공부하여 그 안에서 가장 격동적인 현대의 변화들을 녹여내고 접목하기를 권할 뿐이다. 난 채식주의가 제대로 변하길 원한다. 쓸데없는 동물학대 역시, 균형잡힌 생태윤리에 의해 사라지길 바란다. 우리가 중심으로 삼을 것은 당위가 아닌 자연인 것이다. (自然-스스로 그러하다)
(나의 '몸' 개념은 나 스스로에게서 생겨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도올 김용옥의 '기철학'의 몸과 닮았다. 참 재미난 사실이다. 난 아직 몸이론을 스스로 확연히 정립
한 바가 없으므로, 독자분들께서는 김용옥의 훌륭한 책들을 읽어봐 주시기 바란다.
[동양학 어떻게 할것인가],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20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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