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 소녀], 폭력 미소녀의 꿈
back to noculture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여린 몸매, 예쁜 여고생 주인공이 새로 전학을 오면서 일상적인 학교생활, 그러니까 수업, 교사의 억압, 연애사업들, 왕따 등 학원만화의
'전형적인' 풍경들이 펼쳐진다. 역시나, 전형적인 줄거리답게 이 학교의 최고 인기를 달리는 꽃미남이 자기 여자친구를 제껴두고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기
가 무섭게, 근데 요즘 만화들답게 그 질투에 불타는 여자친구는 질투나 음해 정도로 끝내는게 아니라 자기 패거리를 끌고 와서 주인공을 문자 그대로 '밟아버리려'
한다.
이쯤 되서 백마를 탄 왕자의 구원을 기대한다면 십년도 전에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줄거리를 읊는 못난 독자가 될 것이다. n세대는 그런 별볼일 없는 나약한 여자
주인공에는 전혀 관심 없다. 다른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우리의 여리디 여리게 생긴 미소녀 주인공이 파워!를 업하여 여깡 패거리들을 '완전 제압'하는 것이다!
만화가 강은영이 그려내는 여주인공들은 대개 한결같이 막강한 힘과 과격함을 지니고 있다. 위에서 얘기를 꺼낸
[과격소녀]도 그렇고, 아주 비슷한 막강 파워걸이
등장하는
[신소녀]도
[아이의 별]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스톰]만이 좀 달라서 여주인공은 육체적 힘 대신 막강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 이 캐릭터만큼은 육제척 파워
를 억제하여 다른 분야로 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막강한 두뇌는 곧 사회적 힘이 된다. 어느 쪽으로든, 독자는 '힘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린 여자애가 주변을 싹 제압해버리는 가공할 만한 육체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은 여자만화의 독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보통 여자들이 선망하는
것은 아름다움과 매력인데, 그 매력은 대개 사회적으로 다소 일반적이고 정형적이라고 할 만한 여성성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개성적인 미감이라는
것도 사회적 감수성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 것이니 말이다. 남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받고 싶다는 점에서 만화 독자들은 예쁜,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선호한다. 그
러나, 또 한편으로 욕망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 초점을 맞출때, 또 하나의 매력지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아리따운 주인공이 그 날렵한 몸매로 사춘기 이후의 육체로는 절대로 남자들한테 이길 수 없을듯이 여겨지는 완력의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한다는 것
에 대해서 많은 여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강하고, 아름답고. 이것이 아마도 현대의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되기 바라는 '바람직한 여성상'의 캐치프레이즈가 아
닐까 한다. 그 강하고, 의 내용과 아름답고, 의 내용이 사람마다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빠방한 전문직의 커리어우먼이나 멋들어진 예술이나 문화 관련 일을
하는 프리랜서 등 한마디로 cf에 나오는 여자들은 힘과 아름다움을 다 가진 사람으로 선호되기 일쑤다. 멋진 여자로 매력이 철철 넘치며 동시에 힘을 가진 여자로
서 말이다. '사회적 힘', 재능, 그런 힘들이 여자들이 실제적으로 느끼고 추구해볼 만한 힘이다.
실생활에서 월등한 육체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소망이다. 지하철에서 다리 찍 벌리고 앉는 아저씨들, 새치기하는 인간들, 쥐도
새도 모르게 성희롱하고 달아나는 놈들, 도를 아십니까? 하며 치근덕대는 놈들, 다 쥐어패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괜히 싸움벌려서 어떻게 될지 무서워서 넘어가는 모
든 일들에 대해 막강한 완력을 동원할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러려면 최소한 기본적으로 건장한 체격조건에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실상은, 과격소녀
같은 그런 가냘픈 체형으로는 괴력이 나오는게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싸움은 깡이라고는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유시진 만화 [쿨핫]의 스포츠우먼 루다는 그 힘에 대해 상당히 개연성 있는 몸매를 하고 있다. 고등학생 루다는 오빠 루리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체격을 하고있고, 실제로 싸우면 늘 이긴다. 실제로도, 싸움이 되려면 이 정도 몸매는 되어야할 것이다. [쿨핫]은 어디까지나 개연성 충만한 인물들이 나오는,
극히 섬세한 인물묘사가 심히 리얼리스틱한 만화다. 그러나, 이렇게 개연성있는 힘을 자랑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또한 [쿨핫]밖에 못 보았다. 실제 생활에서
는 아주 드물게밖에 만날 수 없는 희귀인물인 셈이다. 만화 독자들은 루다와 자신을 쉽게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너무 '과격한' 몸매다.
그래서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가녀린 미소녀의 울트라 파워업이 기대되는 것이다. 실제의 자신보다도 더 호리호리한 미소녀의 막강 파워! 좀더 쉽게 극대화된 쾌락
을 맛보기 위한 방법이랄까. 남자에게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여자이고 싶은 욕망과 남자를 포함한 주변 모두를 제압해버릴 과감한 힘을 가지고픈 욕망을 같이 충족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파워업할 때만 쓸모있는게 아니라 평시에도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성질 부릴거 다 부리면서 지멋대로 행동해도 좋을 (아무도 못
건드릴) 것이기에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과격 미소녀는 나이먹은 사람들한테도 막 반말해도 된다. ('나이먹은 사람이 주인공에게 존대말한다'는 만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중요 아이템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기까지 오니 [에반게리온]이 떠오른다. 우리의 성질 더러운 미소녀 아스카. ^^; [에반게리온]은 혼돈 속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년 소녀들만이 조종?할 수 있는, 괴
력을 지닌 거대한 생체병기를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두려움 사이에서 고민하는 역을 주로 신지가 해댄다. 뒤로 갈수록 자아의 문제를 판답시고 꿀꿀해져
갔지만, 역시 그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그 섹시한 거신병이 뒤꽁무니에 플러그를 꽂고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며 싸운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인류
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춘기 청소년의 막강 파워 정도라고나 할까.
확실히 포스트 '르네상스'* 시대의 독자들은 여느 꿈꾸는 사춘기 소녀처럼 꿈을 꾸지만, 힘을 가진 남자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의 독자들보다 휠씬 더 관심이
없다. 대신 힘을 가진 여자를 동경하고, 그에 감정이입하는 편을 택한다. 신세대가 달리 신세대가 아니다. 최근 등장한 강은영의 과격 소녀들이 새로웠던 것은 그 힘
이 사회적이거나 실제적이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육체적인 힘으로서, 그것도 초롱초롱 눈망울의, 재밌게도 성질 더러운 미소녀의 형상 속에 구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더러운 성질은 아마도 중고딩 독자들이 학교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권력관계에서 굴복하는 현실을 뒤집어 스스로 그 파워를 갖고 싶은 욕망을
직접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뭐 단지 동경할 수도 있고.
*만화잡지 르네상스의 창간(1988년?)을 앞과 뒤로 하여 한국의 여자만화계는 질적으로 다른 역사를 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생각도 아니고 오래
된 여자만화 애독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일반적 사실이다. 포스트 르네상스의 한국의 여자만화는 그간에 '순정만화'로 불릴 이유들을 많이 떨어내고 다양성과 작
품성 이 두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만한 질적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선남선녀의 멜로드라마'의 등식 안에서만 주로 머무르던 스토리를 벗어나 훨씬 다양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스토리와 설정, 장르로 바뀌어간 것이다. 이 변화는 프리 르네상스 시기에 한국만화를 보며 성장한 만화가들이 본격 등장함에 따라 작가마다의
다양하고 깊은 주제의 탐구가 이루어지면서부터다.
지금 한국의 여자만화계는 일본문화의 본격 개방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에서 '께임이 되는' 유일한 분야라고까지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남자만화의 '일본따라하기에
공장제 일변도'가 망하게 되면 따라 망할 위협은 받고 있지만 말이다. 음악이나 영화나 게임이나 뭐 하나건 일본수준 따라갈 것이 없지만, 여자만화만큼은 다르다.
양적으로는 딸리지만, 적은 양 안에서는 아주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물론 힘을 동경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태껸이나 유도 등 무술을 배운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기초체력을 기르는 것만 열
심히 한다면 엔간히 써먹을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기르는 것은 가능은 하다. 단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려울 뿐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자신의 짧은 역사
에 스며들은 버릇에서 상당히 비껴나는 일이니. 난 여성들이 무술을 연마해서 여차하면 생기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된다면, 생활 속에 부딪히는
수많은 더러운 꼴에 시시비비를 걸고 나갈 자신이 있다면, 훨씬 더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세음보살처럼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살면 모를까
정상적으로 살다보면 지나치게 생성되는 두려움과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 말이다.
요즘 같은 탈산업화 사회에서도, 육체적인 힘이란 것은 인간관계에 궁극적으로 작용하는 권력관계다. 여성이 자유를 원한다면,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이기도 하
다. 그래야 마음대로, 성질대로 살 수 있다.
2000.7.26
back to no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