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패션이야말로 움직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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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뛰어난 CF는 그 시대의 중요한 의식의 변화의 대목을 제대로 잡아내어, 거기에
'언어'를 부여한다. 90년대 상반기 신세대 논쟁에 온나라가 들끓기 바로 전에는
'그녀가 나를 떠났다. 난 자유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2000년, 연인들이 투닥투닥 싸우다 헤어지는 아주 진부한 대목에서 터져나온 카피는
다음의 것이였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 한마디 명제로 인해,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정보도 움직이고, 음악도, 과학도 움직이고, 당연 대륙도 움직이는거다. ^^
과학도 움직이는 것
이를테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근거가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인류가 삶을 더 조직적이고 풍요롭게 만들다보니 첨예하게 발전시킨 기술 지식의 한 특이태라는 것을 백날 떠들어봐야 몇명이나 알아들을까? 과학자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십년 전의 과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뼛속 깊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과학도 움직이는 거야'.
유행에 편승한 신문기자가 머리 좀 써서 뽑은 헤드라인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과학은 움직이는 것이고, 우리의 지식은 최후의 기저까지도 '삶의 방편'에서 떨어져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다'고 써놓은, 혹은 '공인된' 명제들의 껍데기 뒤에는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인간들과 지구생태계의 다양한 삶의 부딪힘과 투쟁, 조화의 모습들이 있다. 한마디로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존재'의 패러다임에서 '생성'의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감수성의 과정이랄까? 그동안 우리 동양인들을 끝없는 열등감 속에 빠뜨렸던 '존재'와 '과학'과 '이성'과 '논리'의 압박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 '감각'과 '직관'을 믿고 CF가 만들어낸 신화를 믿고서 젊은 세대들은 움직인다.
(여기에 붙어먹는 떨거지들은 이윤과 통계를 믿는다.)
이성과 언어를 대신하는 감각과 이미지가 과연 거짓없이 올바른 길을 '나'에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과연 젊은이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더 낫기' 때문에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지르한 언어를 떠드는 자들을 믿을 수 없을 때, 바람직한 인생에 대한 설교를 믿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차라리 위악적인 태도, 손해보는 태도, 당장의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행위를 택한다. 그들의 직관은 과연 옳은 것일까?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움직이는 거야
움직인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만큼은 분명 틀린 것이라고, 최소한 그 정도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기의 빠른 발육으로 인해 이미 14살 정도면 12억 인구 중국에서 최고의 모델로도 뽑힐 수가 있는 사회인데, 19살이 되기 전까지는 성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도 지식도 경험도 불가하다는, 불법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제재가 성스러운 법의 이름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분명 틀려먹은 일일 것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단지 '변한다'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꼭 집어 말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나의 사랑' 한가지에 파묻히지 않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한 움직임으로서 나의 마음을 파악하고,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윤리적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적극적인 자유
90년대에 한국의 신세대는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위한 '소극적인 자유'를 획득했다. 21세기의 시작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 가지고는 안될 것이다. 좀더 근본적인,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전체적이고 건설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저 '개인의 자유'라는 당위적인 이념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지구생태계와의 관계 속에서 얻는 실질적인 삶의 폭과 아름다움으로서만 얻어질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계급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율적인 가치결정인 것이다.
그래서 패션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패션은 언제나 나라고 하는 몸이 원하는 것, 그 시대의 몸들이 원하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사람들은 치장한다. 그 모습은 시시각각 피고 지는 사물과 감각들의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언어는 존재의 집일런지 모르지만 패션은 생성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20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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