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새로움과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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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지겨움, 이 두 가지 매카니즘에 의해 좋은 영화가 탄생하고, 멋진 패션이 유행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를 흐르는 것은 반복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우주의 작디작은 태양계에 붙어사는 지구 위에서는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새로움과 변화는 이미 있는 것들 위에서 이루어진
다.
유행이라는게 가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현대인들은 분명 새로운 것을 좋아하며 남들이 손을 뻗치기 전에 먼저 가지려고 하고, 그걸 모두 다 가지게 되면
시들해져서 다른 것에 눈을 돌린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것, 자기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극도의 혐오감만을 내비치며 사실 그런 획기적인 물건은 잘
나오지도 않는다.
지겨워져야 새로운 것을 찾는다
바로 이 진리를 잘 알고 변화의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예술가라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닌데, 그것은 대중과 자기 사이에 이 지겹고
새롭고의 흐름의 타이밍을 적절히 맞추는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딱 반발자국만 앞서가야 하지 너무 앞서가면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차마 대중이 모두 지겨워
해 주기 전에, 이미 지겨운 것은 지겨운 것이다. 감수성이란 우겨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아무리 성공이 좋고 돈이 좋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98년 전세계를 휩쓸었던 텔레토비 신드롬의 이면에는 그동안 끝간줄 모르고 휘몰아치던 뮤직비디오와 cf의 빠른 컷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빠르고 빠른 것들에 지겨
움을 느꼈기에 텔레토비의 그 엽기적인 '느림'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감각과 전혀 엉뚱하게 나아가는 느려터진
텔레토비들의 행동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닌 다 큰 어른들한테는 유머이자, '엽기'였다.
-> 텔레토비론
-> 엽기의 역사
이미지의 광각운동
영상물에서 광각의 사용도 그렇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가 나올 때, 1972년만 해도 영상물에서 그런 광각의 사용은 매우 '지나친' 것이었고, 일상적
인 시각감각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큐브릭은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광각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우리 근처에서 광각은 너무나 흔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것이 되었다. 케이블 티비가 처음 방영
될 즈음 한국에서 만든 뮤직비디오를 도배하다시피 했던 왕광각 내지는 어안렌즈 수준으로 가던 테러블한 영상을 떠올려보자. 지금에 와서는 그런 광각은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와 [중경삼림] 사이에서 벌어진 것은 영상물의 '광각운동'이다. 광각렌즈를 통한 영상은 인간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좁
은 공간은 휑뎅그레 넓어지고, 사물은 더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처음엔 '공포스러움'과 연결되었던 광각이지만, 많은 영상물에서 좀더 트인, 시원한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 조금씩 넓어지다 보니 '자연스러운' 수준에 이르렀고 [타락천사]에서는 아예 코믹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90년대 후반 한동안 뮤직비디오들은 광각렌즈란 것을 몰랐던 옛날옛적의 표준렌즈와 화면배치를 추구하며 코믹한 향수를 자아낼 수 있었다. 이것은 정확하
게 광각렌즈에 대한 익숙함과 지겨움을 표현한다.
패션의 길어보이기 운동과 역운동
복고풍 패션 역시 새로운 분할선을 가져오는 운동으로서 밀려오고, 가는 것이다. 그동안, 그러니까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룩의 기본형이던 딱 바라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선에 걸치는 분할선, 되도록 짧은 치마에 대해서, 되도록 다리가 길어보이게 위는 짧고 아래는 긴 모양을 띄던 형상에 지겨움을 느끼고 새로이 그어버
린 '희안한 분할선'으로서 복고풍은 운동했다.
나의 기억으론 94년 겨울 반골반 통바지가 통굽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복고풍은 서서히 시작됐다. 히피패션을 모태로 하는 이 패션은 여자들의 다
리를 길어보이게 하면서도 뾰족굽에 비해 발이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아주 실리적인 이유로, 나팔바지의 전격적인 등장과 퇴장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변주를 하며
지금까지도 세를 물리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왠만큼 굵은건 표도 안 나는 이점 때문이지 않을까.
헵번 바지라든가, 7부 8부 9부 바지는 이 골반바지 통굽 패션에 대한 지겨움을 표현하고 있다. 발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바지라든가, 짧아진 기장, 높아지려 하
는 허리선, 뾰족해지고 우아, 아줌마쉬해진 구두, 이 모든 것은 다리를 길어보이게 하지 않고 짧아보이게 할 위험요소로 이루어져있다. 그럼에도 다리가 길고 몸
매가 잘 빠진 신세대들은 이런 유형을 소화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아무나 입는게 아닌, 신선한 분할선을 가져오는 패션을 누린다.
치마 길이와 부츠의 관계
치마를 보면 이게 더 뚜렷하다. 90년대 들어 점점 짧아지기만 하던 기장이 갑자기 내려와 96년 이후로 무릎밑 근처에서 정착하는 복고풍 패션은, 다리가 완벽하
게 잘 빠지지 않은 여자에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 길이가 익숙해졌으니 그냥 아무나 입지, 90년대 후반 '길이 혁신기' 당시에
는, 특히나 스트랩힐과 같은 얕은 구두를 신는 패션은, 아무 생각없이 유행따라 입었다가는 몰매를 면치 못할 유형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여자들을 구해주는 방법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부츠였다. 90년대초 신세대 열풍보다 조금 일찍 시작하여 끝도 없이 올라가던 치마길이에 맞추
어 길어지던, 특히나 겨울철 사랑받던 부츠가 다리를 완전히 가리는 시점에 이르르자 이에 실증내고 짧아지려고 할 때, 때마침 치마의 길이가 무릎으로 내려오면
서 걸맞는 분할선이 성립된 것이다. 새로운 라인이 형성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리가 굵어보인다던가 하는 신체적 결함은 커버가 된다.
여름에까지도 그 분할선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부츠를 신고다니던 여자들은 이젠 더이상 부츠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동안 '촌스러운 것이 아름답다'의 구호를
외치던 치마와 부츠의 분할선은 더이상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며 그냥 '아름답다'로 정착해버렸다. 이제 이 분할선이 지겹게 느껴지는 날, 새로운 분
할선의 유혹이 시작될 것이다.
익숙함이 지겨움이 될 때
패션에 있어서나, 시각적 이미지, 영화의 유형들,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것은 언제나 수많은 지겨운 것들 위에서 가능하다. 최초에 익숙한 것이 있었다. 인간이라
고 하는 종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몹시도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 오면 먼 옛날 조상들의 패턴을 반복한다. 생명이라고 하는 자기조직
체는 자신의 안일무사한 생존을 위해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 위에,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새로운 것을 선호하
는 성향을 '조금' 지녔다.
수많은 익숙하고 지겨운 것들 위에서, 적절히 익숙하고 적절히 새로운 것을 배합하여 쾌감을 주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재주다. 너무 익숙한 것은 '아류'가 되거나
심지어 '표절'이 될 수도 있고, 너무 새로운 것은 '전위'라고 받아들여지지도 못한다.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서로 다른 경험에 따라, 서로 다
른 예민함과 둔감함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줄기들로 엮어져 굴러간다.
패션은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유행'이라는 말만으로도 사람들은 패션을 대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이 산다. 실제로 많은이들에게는 패션이란 단지 유행일 뿐일
것이다. 한국처럼 획일적인 유행에 지배되는 사회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이번 시즌의 유행'을 예측하고 조정하려드는 패션업계의 희망과는 별도로, 패션은
어디까지나 각각의 다른 개인들의 다른 표현들 위에서만 존재한다. 각각의 다른 문화들의 겹침과 벌어짐, 다른 속도에 의해 그 아름다움은 결정된다. 다른 속도로
흘러가던 것들이 만날 때 신선한 것,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 이점이 보장될 때, 한국에서도 남뒤만 쫓아가는 것이 아닌 패션이 융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0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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