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여성해방보다는 사이버섹스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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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은 몹시 찝찝한 마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한다. 나라고 여잔데 이 웃기는 차별구조와 억압이 지금의 '정보화사회'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유전자공학 시대', '사이버섹스 시대'에서도 계속 별 개선이 없으리라는 예언을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차별 중에서도 가장 '배은망덕'한 형태인 여성차별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게 내 정직한 생각이다.
현대 사회의 여성은 해방되었는가?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그리고 특히나, 더 좋아지게 스스로 만들 수 있는 힘과 운신의 폭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은 심각한 굴레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굴레의 핵심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리조건을 둘러싸고 있어서 아직도 여성이란 존재를 특징짓는다.
남녀평등론이 아무리 남녀가 평등하다고 모든 문제는 문화적인 차별에 있다고, 남녀의 신체적 능력의 차이가 개인차보다 적다고 떠들어대도, 분명 여성과 남성의 신체의 차이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이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사랑을 할 때까지는 좋다. 그런데, 여성은 아이를 낳는 성이기 때문에 원치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위험을 안고, 원하는 임신이래도 임신기간과 출산의 고통을 그대로 떠안으며, 그다음엔 육아에 자기인생을 희생하는 역할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자연히 독립된 사회인으로서의 활동은 위축되고, 무엇보다도 여자로서의 가치가 하락한다. 그렇게 되면 여자는 오로지 남편이나, 자식한테나 그 희생의 보답을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 여성은 자유로와질 수 없다. 물론, 목적이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어떤 제약 속에서든 행복하면 그만인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인간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유가 옳고 좋으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 또한 없다. 독신녀가 되어 도시 속의 외로운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할지 못난 남자라도 만나서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답해줄 수 없는 것이다.
시작은, 여자가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데서부터이다. 현대 사회의 변화는 계속해서 개인의 힘을 증대시키고 독립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다. 여자는 이제 큰 희생 없이도, 즉 가족과 정서적으로 밀착되어 살던 삶을 버리고 허허벌판에 홀로 떨어져서 사는 것과 같은 외로운 이방인이 되지 않더라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방도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이 산업화가 가지고 온 성과다. 기술과 사회제도 모두가 그렇다. 여기에 문화적으로만 성공을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문화적으로 성공한다면, 이라는 그 말을 뒤집어서, 문화적으로 걸리적거리는 게 많기에 아직도 요모양이라는 것을 난 말하고 싶다. 과학기술이 제아무리 발달을 했다고 해도 문화가 억압하는 한 혜택은 여성이나, 일하는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지 못한다. 기술은 공정하게 발전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생리통약보다는 쓸만한 사이버섹스 시스템이 먼저 나올것이라고, 씁쓸한 예언을 해보는 것이다.
기술발전의 원칙
기술은 그냥 발달하는게 아니라 사회 안에서 그 힘을 받아서만 발달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할 진리는 1. 기술발전은 값싸고 편리한 노동력이 넘쳐나는 한 저지된다, 는 사실이다.
즉 불편과 고통을 감수할 사람들이 있는 한 그것들을 대체할 기술을 일부러 개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주 좋은 예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일어난 혁혁한 기술발전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덕에 일어난 것이다. 임금을 달라는 대로 주고, 노동시간을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시간으로 줄여주고도 안 망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해리 클리버, 풀빛)
이 얘기는 거꾸로 하면 그만한 이유, 개발하지 않고는 못배길 압박을 주지 않으면 기술은 발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가 된다. 따라서, 그냥 내버려두면 절대로 미국의 막강한 제약회사들은 완벽한 생리통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을거란 얘기다. 자본주의의 이윤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한, 그들은 대부분의 여성이 생리증후군에 시달리며 한달 내내 평생 동안을 자기네 마약을 사먹을 것을 희망할 것이다.
생리를 없앨 수도 있었는데
80년대에 이미 생리를 한달에 한번 그냥 뽑아내는 기술을 한 미국의사가 발명했지만, 각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처음 마취수술법이 나왔을 때 많은 의사들이 '아프지 않은 수술은 수술이 아니다' 라고 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었던 것을 아시는지? 지금의 우리는 웃기는 소리 하고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한달에 한번씩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열흘 이상씩도 그토록 불편하고 아프고 비참한 상태를 '생래적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미 맘만 먹었으면 기술을 개발해서 널리 전파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몹시 기분 나쁘고 열불나는 일이다.
인류의 50 퍼센트인 여성이 다달이 겪는 고통을 없애는 것은 돈이 안 되고, '삶의 기쁨이자 유전자의 요구'인 아이를 못 낳아 고통을 격는 10 퍼센트(확인 요망) 불임부부를 위한 인공수정은 돈이 되길래 이렇게 발전을 했다는 것이 위대한 현대의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돈보다는 의식이 발목을 잡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여성의 생리적 고통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부부가 자기네 유전자칵테일로 완성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돈'이라고 간단하게 표현되는 자본주의사회의 작동법칙은 힘을 가진 자들의 비위에 맞게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다. 기술은 문화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어법에 기대고, 그것을 혁신하는 방법으로써만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래서 방법은 '돈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드높은 비율의 낙태수술을 대체할 간편한 낙태약을 시중에서 판매하도록 하고 동시에 청소년 피임교육을 강화한다면, 큰 돈벌이가 없어지는 중소 산부인과들은 더 양질의 써비스를 지속적으로 여성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한의학의 노하우를 배워오는 노력이 필요해질 것이다. 또한, 생리가 아직 불안정한 사춘기 여성들을 위한 생리통 크리닉을 여는 것이 유행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조건 '참아야 되는 것'인줄 알았던 생리통도 효과적으로 다스리게 되면, 여자의 일생을 비밀과 인내로 시작하는게 아니라 건강한 몸과 쾌락을 위한 섭생법을 배우면서 시작하는 아주 바람직한 세대가 출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전자공학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가?
유전자공학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거나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인류에게 열어주지만, 새로운 형태의 계급구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기공장을 만들어 임신과 출산에서 해방되는 것이 지구 이쪽에서는 완벽한 자유를 원하는 여성들의 꿈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식량 몇 푸대에 휘둘린 가난한 여성들에 대한 무자비한 몰모트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신체를 강탈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은 정당하다.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창작과비평사)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에서 여성에게서 강탈을 몰아낼 것만을 생각하느라 당위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미 인류와 기계의 공진화가 인간 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고 사이버섹스가 언제 뒤따를지 모르는데, 인간의 육체를 '기계로부터 순결한 채로' 간직하겠다는 고집은 자연에 해끼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 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보호주의처럼 짧은 생각인 것이다.
** 인간들은 자연파괴니 환경오염을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특별한 사악함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오염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며 급속히 성장하는 생물종이라면 누구에게나 수반되는 결과이다. 생물은 어디까지나 물질대사를 통해 영양분을 빨아들여 자기몸을 만들고 유지하며, 부산물을 분비하면서 사는 존재니까. ([섹스란 무엇인가?]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호) **
제 2법칙, 투쟁보다는 욕망이 먼저다
기술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매카니즘의 두번째 원칙은, 인간은 투쟁보다는 욕망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즉, 여자들은 생리를 간편하게 뽑아내는 기술을 요구하는 데모를 하기보다는 생리중이 아닐 때 예쁘게 꾸미고서 멋진 남자를 찾아나서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얘기다. 이 문제는 여자나 남자나, 선진국민들이나 후진국민들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펼쳐진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동떨어진 새로운 삶의 방식이 나올 수는 없다.
지금 지구 도처에서 목격되는 다양하고 변태적인 성의 탐닉 역시 인간이 얼마나 욕망에 따라가는 동물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개별적인 인간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욕망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지만 인류전체의 수준에서 봤을 때 지금 가속화되고 있는 '생식과 분리된 성의 탐닉'은 이미 번성을 해도 한참 한 인류라는 종의 지나친 번식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혹시라도 다른 별에 가서 살 방도가 마련되기 전에는 최선의 방향이지 않을까 한다. 단지 자본주의가 문란한 성문화를 획책한다고 착각하는 유생들은 달라진 생태적 조건에 대해서 반성해 보아야 하며, 또 우리의 조상들은 얼마나 다채롭고 난잡한 성생활을 통해 이렇게도 진화된 몸을 우리에게 주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현대적인 피임약에서 시작하여 유전자공학의 발달, 사이버섹스,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 인종의 탄생까지, 계속해서 성은 점차 생식과 분리되어가며 인간 개체들은 더 넓은 자유를 얻는다. 비록 그 자유의 대가가 어떤 것이 될지 아직은 예측도 하기 힘들겠지만, 그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200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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