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너의 망상과 나의 망상이 어느 것이 더 강한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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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과 진리
나는 망상과 구분되는 올바른 인식이란 것이 있다는 주장에 회의를 품고 있다. 나는 단지 좀더 말이 되고 그럴듯한, 적합한 결론을 얻으려 하며 이것이
다른이들의 '헛된 망상'과 가지고 있는 차이는 오직 내 망상의 적절함에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알지만 여전히 집합을 버리진 않는다.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버그를 조정하며 컴퓨터를
이용한다. 컴퓨터는 아주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했다. 우리는 적절한 망상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조정해가는 기술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라고라?
3D오락이나 버추얼 리얼리티, 각종 시뮬레이션에 대해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낡은 인문주의자들은 허상이 실제세계를 지배한다면서 개탄한다. 그러나
예전에 사진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없었을까? 티비 연속극을 보며 눈물 흘리는 우리는 왠 망상증자인가? 그것은 공인된 허구라고? 공인되지 않은 허구는
비윤리적인 거짓말일 뿐인가? 망상들 사이에는 사회적 구분이 있을지 몰라도 그 질은 동일하다. 자기 바깥의 사물들을 인지하는 감각집합체들은 망상을
갖는다.
지렁이와 컴퓨터
지렁이는 인간들보다는 훨씬 단순한 망상을 갖는다. 8비트짜리 게임기는 팬티엄급 컴보다는 휠씬 단순한 망상을 갖는다. 그들의 삶의 다양성과 여러
특질들을 따져보았을 때 인간의 망상이 좀더 고급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본 매카니즘은 같은데, 지렁이가 밝음과 어둠으로 두 가지의
지각만을 행할 때, 지렁이는 행복한 지하생활자로서의 생을 만끽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별하는 법이 훨씬 복잡하고, 자기로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도 훨씬 많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라고 하는 것은, 피부로 둘러싸인 이 연약한 유기체가 자기 밖의
자극들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재생산과 생산을 하다보니 이렇게 진화된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인공지능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실용적인 망상은 곧 적절한 진리이다. 뇌는 (단백질 뇌든 전자되든 간에)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장
적절한 연결, 즉 빈번한 연결을 찾아내는 것이 일이다.
우리 밖에 있는 실제 세계가 우리의 존재와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상, 명백한 진리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회의하다가는
맹수의 습격을 받아 죽어버렸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는 자신과 사물의 관계에 의존하는 주관에 따라 가장 적합한 망상을 산출하고, 이를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이를 무시하고 자기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배타적인 시점을 주장하는 이론은 파렴치한이다.
실용적인 망상만이 있다
실용적인 망상을 내가 옹호하는 것이 물론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의 논리를 변호해주는, 관변철학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실용주의는 계급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쫓는 한정된 다소 치사한 실용주의보다는 훨씬 넓은 차원의 것이다.
대략적으로 보아 현재 (서구문명의 자연) 과학은 10년전의 진리는 이미 무용지물로 친다. 점점 더 빠르고 다면적으로 발달해가는 연구성과들은
10년전의 연구결과물들을 귀중히 여겨 지금을 지속하지만, 이미 10년전의 과학은 과학이 아닌 것이 이 과학이 지니는 고귀한 성격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10년 혹은 몇년 혹은 몇달의 단위들 위에 우리의 실용적 망상은 진위판정와 채택탈락을 반복한다. 오디오기기의 갱신 주기는 3개월
정도라고 알고 있고, 종교는 그 스케일이 몇천년까지도 이른다. 끊임없이 탈과학화와 과학화를 계속하는 과학의 운동은 내가 말하는 그대로의 실용적인
망상 자체를 보여준다. 바로 이것을 말하려고 했다.
강한 망상이 승리한다
강한 망상이 승리한다. 올바른 망상이 아니다. 올바름이란 우리들의 실생활을 구성하는 활동들에 혹은 나름의 의미체계 안에서 합리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가일 뿐이다. 어떤 망상이 더 적합한가는 늘 쉽게 판정날 수는 없는 일이다. 대개 현재의 삶의 방법들을 더 낫게 유지하는 데에,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리는 데에 도움을 주는 망상이 올바른 것의 인가를 받는다. 한때엔 가정의 화목과 유지 재생산을 위한 가치들이 목숨걸고
증명되는가 하면, 한때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다양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가치들이 환영받는다.
나는 사주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믿는데,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이란 것이 있어서 그걸 따라 살아가다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예측가능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보면 대개 논쟁에서 이기거나 남을 감화하는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한 기를 타고난 사람이다. 이는 내가 논쟁이란 걸 신뢰하지
않게 하는 상당한 이유가 된다. 것말고도 이유야 자명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믿고 싶어하는 것 외에는 도무지 어떤 사실도 패러다임도 모델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생물체가 가진 엄청난 보수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쨋거나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별소용없을 것이다.
어떤 때는 이러한 옹고집통이 살아남는데 엄청나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생활습관이나 생명활동 자체가 격변하는 때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개체를 망하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또 번식하면 되니까 상관없고, 인간이 아니어도 또 다른 것이 번창하면 되니까 역시 문제될
건 없다.
망상의 힘
그러나 망상이 있다. 인간은 어느 순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어떤 영상, 어떤 삶의 방식, 말투에 쉽게 감염된다. 이미지로 습득한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여전히 재빠르게 반응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짧은 문명의 관행은 언어를 통한 지배를 당연한 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하찮은 기쁨으로 돌리고 항복을 계속하게 해왔지만, 컴퓨터혁명과 사이버네틱스는 이제 그것을 무효화한다.
인간이라는 미생물 군집체의 별난 형태의 지성이 만들어낸 도구들은 이제 다른 차원의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란 걸 발명한 것
이상으로, 컴퓨터 네트워크로 이어질 사이버지성은 수많은 다른 접합과 망상의 패키지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 잠재성은 엄청나다.
망상과 망상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의 망상妄想은 우리들 뇌의 망상網狀과 우리들 환경의 망상網狀과 같은 발음이다. 인간은 네트워크 안에서, 그 사이에서
사고를 하며, 외부의 망상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또한 자기를 통과한 망상들을 다른 곳에 퍼뜨린다. 꼭, 우리 뇌에서 사유와 감각이 시냅스의 단절과
연결로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듯이 말이다.
여기서 '개인'이라는 한정되고 특별한 형태와 인간이라는 존재를 동일시하는 일은 설득력을 잃어간다. 근대라고 하던 시절, 소수 지식인들의 망상과 가책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어디에고간에 없었던 자율적 주체의 환상이 개박살난 지도 오래되어 포스트모더니즘마저 따분한 것이 된 지금, 다른 형태로,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 지금 여기이다. '그 사이'에만 있다.
- 이 글은 97년에 쓴 글을 수정한 것이다.
20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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