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다찌마와 리]와 한국 양아치리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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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와 양아치의 차이를 아시는지? 깡패는 자기네끼리만 싸운다. 양아치는 민간인을 괴롭힌다.
-.-; 급이 다르다. 그래서 깡패는 자기를 양아치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 한창인 양아치'리즘'이 처음 출현한 것은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부터라
고 나는 본다. 옛날엔 임권택 감독이 거의 깡패영화 전문감독으로 불리우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하나, 60년대에 그 영화롭게 활짝 꽃피었던 것이 박통 시절에 한번 완전히 죽었다가 90년대 들어
서야 이제 좀 살아난 것이 한국영화이므로, -.-; 계보를 [저수지의 개들]에서부터 쓰기 시작하는
것도 정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
90년대를 통해 전국민에게 비디오가 보급된 이후 남자들의 여가 레파토리를 장악하던 홍콩 깡패
리즘의 토양 위에서 분명 이 양아치리즘은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나 최민수가 보여주는 [모래시
계]의 비장미는 깡패리즘에 속하지 양아치리즘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저수지의 개들] 이후로
나오는 영화들에서야 양아치리즘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즉, 깡패만 양아치와 다른 것이
아니라, 양아치리즘도 깡패리즘과는 다르다.
양아치리즘과 깡패리즘의 차이
홍콩 깡패영화와 같이, 최민수의 깡패영화는 '남자의 낭만'을 기조로 깔고 있다. ([모래시계]는 티
비드라마이지만 일단 같은 것으로 분류하자.) 본질은 선한 주인공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깡패 조
직에 휘말리고, 그 다음엔 꼭 어디서 나타난 선녀같은, 순수한 마음씨의 부자집 딸래미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것이 '남자의 의리'와 첨예한 갈등을 빚게 사건이 꼬여버리면서 결국 주인공
은 의리를 지키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정에 따라 부자집 딸래미는 가난한 집
딸래미나 장님이 될 수도 있지만 '순수의 구현'은 필수사항이다.
이 비장미가 양아치리즘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이 한국관객들
을 끌어모은 것은 웃기는 리얼리즘 덕이었지 비장미나 숭고미가 아니었다. 곧죽어도 생까는 리얼
리즘, 이것이 양아치리즘이 깡패리즘의 비장미에 反하며 내세우는 새로운 기조다.
그래서 양아치영화에는 부자집 딸래미가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깡패리즘이 보이고 있는 온달
컴플렉스, 즉 계층상승욕구는 자기정체성의 부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 맞닥뜨릴 때 깡
패와 부자집 아가씨의 사랑은 금방 비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아치영화에는 간혹 가야 양순
이들이나 나올 뿐이다. 양아치들은 자기자신을 안다. 불가능한 사랑이나 죽음의 비장미로 카타르
시스를 느껴볼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만약에 부자집 아가씨가 나와 양아치와 사랑을 한다면 그건 (남명희의 지적대로) 로맨
틱 코메디가 된다. 비극의 재목은 절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에서 이완과
카메론 디아즈가 보여주는, 어설픈 건달과 똑똑하고 무서운 부자집 공주님이 벌이는 귀여운 코메
디는 최근의 양아치리즘의 로맨틱 코메디 버전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양아치리즘이 추구하는 '리얼함'이라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의 과장법
이다. 현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상당히 현실스러운 것, 비장미를 버리고 누추한 현실을 이야기하
겠다는 '자세'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것이 비장미 대신 종종 코메디를 몸에 두르는 것은 역시 더
이상 깡패리즘의 신화를 휘두르기엔 '쪽팔리기 때문에', 이미 다 아는 사실인데 멋진 주인공역에
도취되기 힘든 요즘의 젊은이들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백수리즘과 양아치리즘
양아치리즘의 바탕에는 백수리즘이 깔려있다. 80년대 깡패리즘이 90년대 양아치리즘으로 변질된
것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백수리즘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수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삶을 개척하는
도시인들을 말한다. 그리고 노동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그들의 존
재양식을 이즘화한 것이 백수리즘이다.
최근 들어 백수는 한물간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의 노동양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산업과 새로
운 노동양식을 만들어내는 중인 가치창출의 저수지로서 최고급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놀고먹는 밥벌레로서, 사람구실(가족부양)을 못 하는 건달로서 최저급의 의미를 전통적
으로 갖는다.
그래서 스스로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백수들은 자기를 양아치라고 비하한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느냐, 마느냐까지 이슈가 되는 요즘 고딩들의 세상에서는 학생과 백수의 경계가 그리 또렷치
않고, 새로운 가치창출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백수는 자동적으로 양아치가 되어버리는 것같
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한창때라는 것이 다시 고딩으로 이동하면서, 젊은이 문화의 중심이 된 십대
가 양아치리즘에 물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만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소년만화야 원래 폭력성향이니 그렇다쳐도, 요즘엔 여자만화를 보더라도 학원의 양아치화가 얼마
나 심화되었는가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교내폭력이 예전보다 많아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전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성질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길가는 애 삥뜯는 주인공이 순정만화
에 등장했다는, 양아치'리즘'의 등극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힙합의 유행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힙합이라고 불러주기도 싫은, 한국적 정서
에 걸맞는 즉 뽕짝을 기조로 하여 좋은 노래 갖다가 망쳐놓고, 아니면 적당히 표절해서 이어붙이
고, 거기에 랩 좀 치고 손가락에 힘 주고 반항하는 척 좀 해보는 힙합의 유행은, 그 바탕에 양아
적인 반항과 비애의 정서를 깔고 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르는, 자기의 파워를 길러낼 능력이
안 되어 스스로 양아치라고 비하하며 방황하는, 자기폼은 사실 개폼이라고 자조하고 있는 십대들
의 자기반영이다.
(이것은 락의 '죽어도 개폼'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양아치리즘의 종말
글쎄,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픽션]까지는 즐겁게 열광했던 나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심지어
는 [넘버쓰리]도 보지 않았고, 단지 [다찌마와 리]의 복고풍에만큼은 퍼득, 하고 엎어졌다. 남들보
다 빨리 질리는 나의 성미를 고려하더라도, 지금 극장가에서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친구]와
다소 인디스러운 팬층을 형성하며 인기를 끌은 [다찌마와 리] 이 두 작품을 끝으로 한국의 양아
치리즘은 이제 끝으로 다가가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 이 모양은 재미있게도 90년대 중후반 한창 물이 올랐던 얼터너티브락의 뮤직비디오가 그 전성
기를 끝내는 조종을 radiohead의 [just]가 울렸던 것과 비슷하다. '영화적', 아니 뮤직비디오적 내
러티브 기법이 정점에 이르러 더 이상의 것이 나올 수 없었던 때, [just]는 내러티브형 뮤직비디
오의 절묘한 패러디를 행했다. 이와는 대비되는, 내러티브형 얼터뮤직비디오로서 '정석적으로' 만
든 최고의 작품은 collective soul의 [the world I know]였다. 그후 내러티브형 비디오는 내리막길
을 걸었다.
[주주클럽의 '나는나' 뮤직비디오-원한의 페미니즘을 뛰어넘는 새로운 주체 형성]
**
[다찌마와 리]의 복고주의는 현재의 양아치리즘을 쇄신하려 한다. 단지 촌스러운 의상이나 오버
만빵의 대사로 사람잡는 유머를 만드려고 복고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다. 바로 낭만주의! 남자의
낭만을 다시금 도입하여 그동안 리얼리즘 몇번 해먹고는 금방 다시 재미없어져 버린 양아치영화
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다찌마와 리]는 한국 양아치리즘의 조종을 울린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은 없는
것이다. 양아치리즘은 더 이상 어설픈 리얼리즘을 표방하며 재미를 주지 못한다. 누추한 현실은
코메디로서도 2번 이상 보기란 힘든 것이다. 낭만주의는 돌아왔지만 철저한 패러디로서였다. 그렇
다면, 이젠 쉼을 기다리고, 다시금 비장미가 가능한 형식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좀 봐줄만한
것을 기대한다면 말이다.
요즘은 깡패리즘와 양아치리즘이 혼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티비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에서 안
재욱이 보여준 캐릭터는 양아치 주제에 부자집 딸래미와 신분상승을 꿈꾸는, 코믹하다가 나중에
비장해지는 웃기는 성격파탄이었다.
[친구] 역시 이미 양아치리즘으로 분간되지 않는다. 부자집 딸래미가 없는 리얼리즘이라는 면에
서는 분명 양아치영화인데, 그 섬뜩한 비장미로서는 깡패영화이니 말이다. 양아치리즘은 이제 깡
패리즘에서 스스로를 분리할 이유를 못 찾게 된 것인지.
[죽어나 혹은 나쁘거나]는 양아치리즘의 인디 버전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극심한 교훈주의를 보면, 류승균 감독이 차기작으로 만든 [다찌마와 리]의 철두철미한 희화정신을
생각할 때, 도대체 이 감독은 다시 양아치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면이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돼' 하고 나서, 그다음에 자기 손으로 직접 양아치리즘의 조종을 울리다니 말이다.
이제 무엇이 나올까? 깡패영화는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할 것인가?
2001.5.4
용어정리1: 양아치리즘은 깡패리즘의 하위개념으로서, 90년대의 양아치리즘은 80년대의 깡패리즘
을 이어받으며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용어정리2: 양아치리즘, 깡패리즘, 백수리즘 용어는 사실 표준어에 집착하자면 양아치이즘, 깡패이
즘, 백수이즘이 되어야할 것이지만, 리얼리즘, 소샬리즘, 아이데알리즘, 캐피탈리즘, 대처리즘 등
많은 -주의들의 끝을 우아하게 장식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리즘이라는
이유로 그냥 '민간 어원설'로 가기로 하였다. ^^;
이 칼럼의 슬픈 전설: 이미 1, 2주 전에 상당한 양을 집필해 놓고도 저장을 안하고 실수로 전원을
꺼버리는 바람에 다 날려먹고는 허망해하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쓰게 되었다는..-.-; 슬
픈 이야기.
혹시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을 볼 마음이 생길 분들을 위한 개인적인 별점:
[다찌마와 리] ★★★★ 오메, 징한것!!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와싱톤 ㅠ.ㅠ;; 때문에..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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