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브랜드 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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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옷은 환상이었다. 주황색 후드윗옷
(일명 케니옷)는 너무 이쁘다. 전체적으로 색채감각이 아주 뛰어나다. 적절히 빈티지하면서도 아무나 못 따라하는 무늬나 디자인, 배색감각을 자랑하는, 세련된 옷들이었다.
2000년 겨울옷은 지나치게 빈티지만을 강조하여 그 색채와 스타일이 약간은 식상한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백화점에 오는 사람한테 팔기는 힘든 옷일듯. 특히나 겨울코트인데 방한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는 느낌. 일본에서 온 브랜드라 그런 것인지? 일본겨울은 따듯하다고 하니까.(남쪽에는) 아무튼 그뒤에 망한 것인지 보이지를 않고 백화점 할인매장과 홍대앞 옷집에서 가끔씩 겨울코트들을 보게 된다. 굉장히 아쉽다.
롤롤
처음 롤롤이 나왔을 때 그 이미지 모델의 뽀글뽀글 머리는 잊을 수 없다. 그때는 한동안 모든 한국 여자들이 죽어라 생머리만을 고집하며 70년대 복고풍의 절정을 이루던 때로, '그냥 파마'를 하면 아줌마란 오해를 사기 십상이기에 앞서가는 감각의 소유자들-혹은 지겨운걸 못 참는 여자들이 슬슬 왕뽀글이 머리를 하고 나왔던 때다. 한동안 기본적으로 귀여운 느낌이면서도 약간씩 감각있는 색채를 가미해주는 즐거운 브랜드였다. 98년 가을에 산 오렌지 반팔과 칙칙한 겨자색 몸통의 티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이뻤다.
그때만 해도 스무살, 이라고 하는 타겟은 상당히 '젊은' 타겟이었는데, 요즘의 롤롤은 풀이 팍 죽어 스물몇, 이라고 하는 애늙은이들을 타겟으로 하는 심심한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정말 아쉽다. 세월의 변화가 무상하다. 요즘엔 20대만 되도 다 늙은이들 같이 군다. 감각이 아니라 돈으로 승부하는
명품 유행 유감.
키라라
98년, 99년까지도 지속적인 마녀옷의 컨셉을 밀고 나가 나의 경애를 받았던 브랜드이다. 요새는 텔레그래프 살짝 따라하기 정도의 컨셉인듯, 영 맘에 안 들지만. 처음의 그 별별가지 까만 중세풍의 드레스들은, 옷걸이가 못 따라가서 못 입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주 '화끈'했다. 만화매니아들이라면 한번쯤 침을 흘렸을 만한 컨셉이었다. 99년에 드디어 나도 입을 만한 ^^;
마녀옷이 나와 큰 맘 먹고 샀다. 물론 사진촬영용으로 활용은 많이 했다. 98년 여름의 중세풍 스퀘어네크라인 원피스도 정말 멋지다.
OZOC
내가 오조크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97년 홍대앞 어느 옷집에서였다. 아직까지 한국 오조크가 나오기 전, 일본에서 들어온 보라색에 연두색 땡땡이가 있는 아주 멋진 겨울 셔츠였다.
(일본오조크옷) 역시 일본인들의 색감각은 죽여준다. 한감각하는 여자들은 다 어디서 샀냐고 물어본다. 그후 한국 오조크가 몇년간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IMF를 구실로 한 파스텔톤의 유행에 편승해 절대로 튀지 않는, 세련을 가장한 밍밍한 색상과 스타일만 줄줄이 나온 것이다. 점잖은 한국인들은 좋다고 많은 사입은 것 같다. 동대문 패션상가에서도 오조크 카피들이 꽤 인기있었으니까.
그런데 드디어 이에 지겨움을 느낀듯, 2000년 봄여름이 되자 루비나부터 해서 오조크 및 여러 비싼 브랜드들이 아주아주 화사한 색상들의 강렬한 대비를 시작하여 날 즐겁게 했다.
(2000 봄/여름 SFAA 컬렉션 루비나)
기본적으로 파스텔톤의 연장선이지만, 아주 기깔나는 색채들이 많았다. 그뒤 다시 좀 심심해지는 감은 있지만, 그래도 '남의 결혼식용 정장'을 살 때 다른 브랜드보다는 좀 나은듯. 2001년 가을의 안개낀 꽃밭 같은 연두색 블라우스도 아주 예쁘다.
오즈세컨
오즈의 서브브랜드라 역시 공주발은 확실하다. 오즈는 갈수록 볼거 없어져가도 오즈세컨은 여전히 귀엽게 깨는 디자인들이 나온다. 2000년 가을에 나온 보라색 비대칭 셔츠는 비싸다고 고민하다가 못 사고 만 나의 소심함을 오랫동안 후회하도록 만든 명작이었다.
신시아 로리
공주풍의 극한을 달리는, 매우 독보적인 브랜드였다. 평소 상당한 공주 에너지를 발산하는 나도 '졌다!'를 외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엄청난 공주아이템들로 무장하고 있다. 그 오밀조밀하면서도 과감한 색배합에 천연덕스럽게 달라붙는 찬란한 프릴이니 자수, 장식들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원조 공주의 정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아주 예쁜 팔찌 하나는 산 적 있다. 요새 은근슬쩍 사라지고 그 자리를 '로질리'가 대신하고 있는데, 신시아 로리의 명성에 비교하자면 좀 딸리는 느낌. 어쨋거나 공주풍의 한끝자락은 약혼식 예복으로 통하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망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에는 요거이 있는듯.
톰보이
톰보이야말로 업계의 강자다. 70년대에 생겨나서 아직까지도 브랜드가 노후하지 않고 발랄한 20대 여성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비결은 아무래도 '톰보이성'에 있지 않을까나 한다. 아무리 70년대 복고다 어쩌다 하고 휩쓸릴 때도 톰보이는 뭔가 편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소년같은 이미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되려 요즘 80년대 복고 유행 이후에는 상당히 여성적인 디자인들로 가고있어서 약간은 걱정된다. 색감각이나 디자인, 재질 등에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톰보이는 특히나 가방 등 악세서리가 맘에 든다.
가방은 멋져야 하지만, 동시에 저얼대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나의 지론을 만족시키는 브랜드는 요새는 톰보이밖에 없는 듯하다. 멋드러진 감각이면서도 또 실용성 왕무시하는 다른 '여성 브랜드들'과는 전혀 달라, 아주 괜찮다. 게다가 옷과 달리 가방 같은 것은 재고를 사도 유행에 떨어진다는 느낌이 별로 없고, 원래 톰보이 자체가 유행을 고대로 따라가는 짓은 안 하기에 아주 안전빵으로 싼 값에 살 수 있어서 좋다. 하프매장을 잘 활용하면 좋은 물건을 반값에 살 수 있다.
쌈지
내가 톰보이 전에 애용하던 것이 쌈지 가방이다. 이쁘고 감각있고 실용적인 가죽 가방이 아주 좋았다. 문화산업에 관여하면서부터 보여준 쌈지의 이미지들도 괜찮았다. 한동안 케이블티비 뮤직채널이 쌈지 덕에 즐거웠다. 그런데 되려 쌈지 피혁류 자체는 '전통의 현대화'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안 이뻐진 듯. 서브브랜드로 만든 딸기는 아주 좋다. 머리핀이나 다이어리 등 팬시제품이 싼값으로 행복해지기엔 그만이다.
EnC
내가 예전에 애호하던 브랜드다. 아직 어깨뻥이 남아있던 시절부터 -.-; 명성을 날리던 이엔씨, 지금도 잘 나가고 있다. 예전의 진취성은 금방 바래졌지만, 약간 절제하는 감각으로 가서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여성 대중의 취향을 겨냥한 얌전한 스타일과 그래도 알아주는 색상으로 승부하는 듯. 그래도 2001년 겨울의 하늘색 코트는 넘 이뻤다!
a.b.f.z
대개 브랜드들이 처음 나올 때는 상당히 진취적인 모습으로 공세를 취하다가, 어느 정도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고 나서 소강 상태로 들어가면 보수적인 모습으로 돌아서는 것 같다. a.b.f.z도 그 점이 아주 아쉬웠던 브랜드다. 그 이름도 유명한 변정수의 동생 변은정의 매력이 기묘하게 피어올랐던 광고사진, 아직도 내 책들의 껍데기로 남아있다.(비닐 씌워서 안 닳는다.^^;)
BoyMeetGirl
B+G. 흠, 영화 로미오+줄리엣이 날리던 때 나온 것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 브랜드명과 똑같은 제목의 만화가 나오기도 했다. -0-; 심플하면서도 꽤 감각을 추켜올리는 티셔츠들이 있었다. 일단 로고가 너무 멋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얘기거리가 될 만한 브랜드들을 거론해봤다. 이 중에서
신발
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것을, 눈치빠른 독자는 벌써 감을 잡으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맘에 들고 사고싶은 신발이 나오는 브랜드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패션, 발을 괴롭히는 신발을 싫어한다. 아주 가끔, 너무 예쁘다보면 용서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신발은 대개 랜드로바, -0-; 최근엔 수제품 등산화 만드는 송림제화에서 맞춰 신고는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 물론 별로 이쁘지는 않다. 편하면서 동시에 멋진 신발은 왜 안 만드는 것인지, 여자들을 모두 매저키스트 혹은 천하장사로 아는 것인지. 가끔 쌈지나 톰보이에서는 맘에 드는 신발도 나온다. 뒤축이 거의 없다보니 내 다리가 짧아서 유감이지 그럭저럭 편하고 깜찍하기 이를데없는 톰보이 보라색 소공녀구두는 성공작이라 할 만하다.
생각해보니, 내 눈을 잡아끌던 신발 브랜드도 있기는 했다.
'사딕'
이다. 한동안 분홍색 노란색 등으로 가죽신발을 만들어 날 즐겁게 했는데, 정작 내 요구를 다 만족시킬만한 명작은 없었다.
2002년 01월 17일
see also 예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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