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선샤인티없이맑지않아도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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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Michel Gondry(미셀 공드리) 감독

<이터널 선샤인>의 첫느낌은, 저 우울하고 청색조를 띈,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나가는 소심한 남자라는 캐릭터가 과연 짐 캐리였단 말인가! 하는 작은 놀라움이었다. 잊고 있었다. 짐 캐리가 코믹이 아닌 연기를 하는 영화, 무려 짐 캐리가 나오는데도 국내 개봉은 은근슬쩍 1, 2주 하다 끝낼 단관 상영. 한편으로는 놀랄 만큼 비대해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 만큼 더 척박해진 한국의 영화계가 때려주고 싶게 미워진다. 왜냐면, 이것은 근래 드물었던 즐거움을 주는 영화, 2005년 하반기에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던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왠지 화가 난다. 이것이 이터널 선샤인의 자막이 올라갈 때의 느낌이다.

사실 짐 캐리가 코메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난 그리 실망하거나 우려하지는 않았다. 어쨋거나 잘 생긴 남자가 아닌가! 그동안 화면에 등장하는 내내 일루절루 늘이고 구겨대느라 그 잘 생긴 얼굴을 제대로 감상하게 내버려두질 않았던 그이니만큼, 이것은 정말이지 희소식인 것이다! 그 고상하게 생긴 케이트 윈슬렛이 머리를 새파랗게 염색하고 좌충우돌 살아가는 ‘충동적인 여자’ 역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예상대로 고지식하고 소심한 측면이 있는 남자와 짐 캐리는 너무 잘 어울려서, 전형적이라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리고 케이트 윈슬렛 역시, ‘난 충동적인 여자야’, ‘그녀는 충동적인 여자야’ 라는 수식어구를 달고 다니면서 온갖 힘을 다 써 지맘대로 살아가는 파란 머리, 오렌지 머리, 연두 머리 여자역을 전형적으로 해낸다. 어찌 보면 어울리지만, 역시 그녀는 고귀한 상류층 여자나 지적인 여자가 어울린다. 내버려 두어도 그냥 스며나오는 것이 아닌 것을 퍼올리기 위해 너무 용을 써서인지, 케이트 윈슬렛의 클레멘타인은 그저 밉지 않은 정도로 전형적이다.

어쩌면 영화 전체가 그런지도 모른다. 미셀 공드리가 공들여 만든,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하지도 않고 재기만땅의 스릴도 넘쳐나지 않으면서도 가슴아프고 담담한 영상들은, 딱 적당한 만큼만 <존 말코비치 되기> 같고 또 근몇년 동안 우리를 가슴뛰게 만든, 과거를 바꾸고 기억을 없애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어질어질한 영화들을 닯은, 결론적으로 추억에 관한 영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라면 절대로 제 발로 걸어들어가 나의 추억을 지우지 않겠다. 아무리 가슴아픈 추억이라도, 괴로움에 잠 못 이루는 추억이라도, 몇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추억이라도, 내 가슴 속 깊이 꽁꽁 감춰놓아 나도 그것이 있었는지 잊은 채 뻐근한 무게만을 느끼며 버거운 추억이라도, 어떤 것이라도 말이다.
사랑의 아픔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한 때는 좋았던 관계가 더 이상 추락할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진 추잡하고 치사한 싸움이 되어버릴지라도, 그 고통을 스스로 잊기 전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언제곤 그 고통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는 모자란 사람일 뿐이다. ‘모자란’이 아니라면 ‘젊은’이라도.

잊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어려운 일이므로 고통을 잊었다는 것은 잊을 만한 어떤 자기 내부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쉽게 잊는 일도 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반드시 발전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회복과정이란 비유하자면 항체를 만드는 것으로서 발열과 오한, 피곤을 동반한다. 인체의 회복기능을 무시하고 그냥 항생제를 퍼붓는 것은 지나치게 짧은 생각으로 몸을 망치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짐 캐리가 연기한 조엘은 스스로의 추억의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의 기억을 다 지워버린 클레멘타인에게 화가 나서 응수하느라 기억을 지우기로 한 것 같다. 하지만 지우는 과정 중에 그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무치게 깨달으며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별별 애를 다 쓴다. 당사자의 승인을 받았다는 이유로 한밤에 남의 침실에 들어와 오만가지 잡담을 하며 찧고 까부는 기억제거 직원들이 가진 일말의 프로정신과 싸우면서 자기 기억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몸부림이 서글프고 우습다. 추억을 재생하다 말고 “그렇다면 말이지,” 자기와 관련없는 기억영역으로 도망치자고 제안하는 클레멘타인이 일으키는 균열들이 아픈 긴장을 일으킨다.

결국 무의식적으로 다시 만나 서로 끌리고, 아직 시작도 못 해본 자기네 사랑의 역사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로 재생되는 꼴을 보게 된 가엾은 ‘시작하는 연인들’은 그래도 “괜찮아.” 하며 구멍 뚫린 뇌와 넝마가 된 가슴으로도 다시 사랑하기를 원한다. 지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사실 티 하나 없이 맑은 마음에만 햇살이 내리쬐는 것은 아니다. 햇살은 어디에나 가득히 떨어지고, 사실 파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기보다는 구름이 살짝 있어줘야 더 예쁜 법이다. 구질구질한 추억도, 가슴아픈 추억도 깨끗이 지워지는 법은 없지만 마음은 다시 아물고 건강해질 수가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다시 맑은 하늘을 내놓기 전에 내린 비같은 느낌이다.

남승희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 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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