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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지음

아이들은 이미 취학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바로 그렇다

사냥꾼인 아버지가 짐승의 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듯이, 농부인 아버지가 곡식과 채소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듯, 현대의 샐러리맨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로 돌아옴으로써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하는 위해 정말로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한다. 이런 이유로 남은 가족들 역시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하게 된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가정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단지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또는 "학원이나 가라" 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는 '누가 가장 기분나쁜가'를 기초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불쾌함'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휘두르는 사람이 가정에서 자원의 배분과 결정을 할 때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전원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불쾌하고, 가장 많은 불이익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패권 경쟁에 열중하게 된다.

'자기 찾기'란 자기평가와 외부평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옳은 해법'을 선택하기 위하여 들인 노력과 시간의 총량이 '옳은 해법'을 선택하여 실행함으로써 발생할 이익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는 것은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에서 지배적인 가치관에 일치할 때뿐이다.

학교에서 익힌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는 능력'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인 메타능력meta competency이다. 말하자면 '척도를 만들어낼 능력'이다. '척도를 만들어내는 힘'은 기존의 '척도'로 계측해낼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도 본래는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교환의 목적은 등가의 물품을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싼 값으로 고가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도 아닌, 교환을 계기로 그것을 가능케하는 다양한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아동학대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으로 생각하는 습관의 필연적인 귀결로 보입니다. ...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성과'는 '제품'에 어떤 부가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과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공'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심신에 이상이 와서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신호를 청취하면 자신의 육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긴 싫고 그래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께 있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신호로 들리게 됩니다.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과정, 이것이야말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생각은 일단 보류하고, 아직은 이해가 안 되지만 주의깊게 듣고 있으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경이와 인내를 가지고 맞이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로 귀기울이지 않으면 소음은 절대 신호로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의 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음이 이미 예감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 중에 있을 때만 음악은 음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는 것은 '배움'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소리를 노래로 들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부모밖에 없습니다.


'스승의 조건'은 '스승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그 스승도 또 누군가의 제자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제자로서 스승을 모시고 자신의 능력을 무한으로 초월하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스승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아나킨은 성장을 멈추지만 스승은 초월할 수 없다고 믿는 오비원은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성장'은 계측가능한 기량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의 개방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 안의 어딘가에 외부로 이어지는 '문'이 열려있습니다. 나이를 먹든, 체력이 쇠퇴하든 항상 나와 다른 것, 나를 초월하는 것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받아서 다음 세대에게 흘려보냅니다. 이렇게 연결하는 일이 나의 역할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킨은 "내가 스승보다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을 때 '문'을 닫아버립니다. 자기 완결을 해버린 것이지요.

그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방법을 우리들은 그 사람이 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을 통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사제관계의 본질은 지적하신 대로 '무한한 존경'입니다.

노동을 하여 낮은 임금을 받는 '불쾌함'보다 노동하지 않고 부모의 잔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는 정도의 '불쾌함'이 더 경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니트라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본래 '아는 것'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꿔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