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 반복과 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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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반복과 변이
반복이 계속되다보면 변이가 일어난다. 그것은 유전자복제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테크노 음악에서도 그렇다. 실은 인간의 모든 지적활동 및 사회활동이란게 그렇다. 지식이 머리속에서 그대로 재생될 뿐 변이가 없다면, 자기의 생각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반복이 계속되는데도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시스템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지금 전세계를 불어제끼는 테크노 열풍을 단지 넘치는 정력을 주체못하는 젊은이들의 레이브파티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테크노는 죽음을 없애고 삶을 들어서게 만드는 선에 접해있다.
테크노바엔 테크노가 없다?
나는 지금 한국에 잠시 불고있다는 '테크노 바람'을 보면서 꼭 붕어 없는 붕어빵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붕어빵에는 배신적으로? 붕어가 없지만 누구 하나 그걸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즐기는 건 그냥 단팥이 들어있는 '붕어모양'의 빵일 뿐이니까. 테크노바도 생기고, 사이버 메이크업도 번성하지만, 그런 테크노 열풍과는 상관없이 요새 테크노랍시고 나온 가요치고 테크노라고 부를 만한 것은 하나도 못 보았다. 대개는 거의 냄새 좀 피우는걸 가지고 테크노라고 하니 웃길 뿐이다. 하지만, 그저 웃을 뿐이다. '법적'으로 고소를 하거나 할 꺼리는 아닌 것이다, 물론.
본래 테크노 음악에서 댄스가 나왔다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은 무시하고 싶다. 왜냐면,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나 틀리기 때문이다. 한국의 댄스음악은 1990년대에 형성된 한국댄스일 뿐이다. 원래 테크노는 춤추기 위한 음악으로 번성했다 어쨋다 하는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모든 음악은 자기 나름의 춤을 가질 수 있는거다. '한국 댄스음악'은 나름의 춤을 가지며 공인된 젊음의 발산 양식으로서 자신에게 충실하며 그 안에서 소통될 수 있는 음악만을 생산한다.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들어서는걸 용납하지 않는다.
반복-집착
90년대 중반 이후 홍대앞 락카페에 심심찮게 출몰하며 나름대로 춤의 일가를 이루어온 나의 감각으로 미루어봤을 때, 테크노가 다른 음악과 본능적으로 다른 것은 '반복'이라는 화두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다. 락도 디스코도 힙합도 기본적인 비트 위에 적절히 반복되는 곡의 흐름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양식 하에 반복은 변이한다. 그러나 이건 언제나 '적절히'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략 3, 4분에 끝나는 노래라면 시작에서 끝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테크노라고 하는 음악은 반복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면서도, '정형적'인 전개와는 무관한, 나름의 변주를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테크노도 많이 듣다보면 그 전개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개는 별로 친절하지 않다. 아주 면밀히 그 변주에 자신을 밀착시켜야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곡들의 연결을 멋지게 해내는 고수 디제이가 있어야만 제대로 춤추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반복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면 큰코 다치는, 무한대의 변주가능성을 가지고서 테크노는 우리를 자극한다. 한마디로, '고수'에겐 춤출 맛이 나게 해주는 음악이다. 물론, '일반인'들은 따라가기 힘든 정도가 좀 쎄서, 대개의 '진짜 테크노바'는 춤추기 좋은 음악을 집중시키는 시간과 어느 정도 진짜배기를 엮어내는 시간을 번갈아 안배하는 듯하다.
너무나도 실험적인
난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실험음악, 진정한 현대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역시 테크노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그 한백년 전에 기존 화성법을 벗어나겠다며 무조 음악이니, 12음기법이니를 만들었다지만, 지금까지도 그런걸 베껴먹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현대음악'이라고 말한다면 참 우스운 일일 것이다.
뭔가 상식을 깨는 이상한 짓을 해서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한번만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테러블한 실험이나 존 케이지의 깨는 짓거리는 단 한 번 실행될 수 있는 예술인 것이다. 후에 조금 다르게 고쳐서 해대면서 예술이라고 불러 달라는 건 몹시 뻔뻔한 태도다. 한번의 예술로 끝나지 않으려면, 수많은 반복과 변이 속에서 스스로의 어법을 다양한 삶의 감정과 질곡들을 표현하도록 형식화해야만 될 것이다. 어느 차원으로든지 소통이 되어야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하니까 말이다.
'예술'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테크노는 '실험적인 현대음악'보다 더 본격적이고, 창의적이다. 다른 음악들과 비교해봐도 실험성과 창의성이란 면에서 발군이라고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 안의 음악들 중에는 말이다. 테크노계의 고수들은 자기가 직접 음원을 만들어서 쓰는 것만 '친다'고 한다. 남이 만들어준 반제품 음원 갖다가 늘어놓는 것은 '어설픈' 방법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물론 멋지게 뒤섞어 이어붙이는 것도 충분히 창조적인 작업일 수 있고 괜찮은 음악이 나올 수 있다. 원래 편한 복제가 전자악기의 미덕이 아닌가. 만약 악기를 직접 손으로 다룬다면 수십년의 세월을 바쳐야 이룩할 수 있는 음악적 기술적 경지를 한 번의 복제로 그대로 운용가능, 대체하는 기계의 특성이 테크노의 강점이다.
그러나 테크노의 가장 적극적인 측면은 역시 소음이 음악이 되는, 경계의 해체가 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갖가지 소리들, 이름없는 일상적 소리들의 음악가들의 가공을 통해 새롭게 음악이 되고 의미가 생기고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 이것이 진짜 묘미가 아닐까. 환경을 음악으로 끌어들리는 것도, 무한한 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디지탈이다. 테크노에 대해서는 이 양면을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 n세대와 테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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