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진보주의자
역시나 제일 고약스러운 것이 80년대 운동권 이데올로기에 쩔은 문화평론가와, 그의 아류들이다. 자기가 적당 수준의 보수주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래도 자기가 보수주의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맑시스트나, 급진론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죽었다 깨나도 자기 수준의 그 끔직한 보수성과 협소함, 크나큰 착각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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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노동자의 음악이기에 락을 옹호하는 자들, 인디영화이기에 당연히 욕설과 이기적인 남성중심주의는 자동적으로 반중산층 이테올로기의 저항정신과 컬트가 된다는 자들, 프랑스에서 유행한 철학이기에 열심히 들뢰즈를 인용하지만 한켠으론 작가주의를 옹호하며 수준도 안 되는 여성다큐작가를 추켜세우는 자들, 그 외에도 혐의자는 많다.
많은 6*년생들은 관변학문의 최정상국 구소련에서 2차대전 후에 떠들어대던 낡은 도그마가 여전히 지상 최고의 과학적 인식이라고 믿고 있는게 아니냐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들의 어려운 시대탓을 할건 없고, 90년대초 이후라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공부를 했다면, 그리고 머리란게 달려있다면 지금껏 그런걸 정조처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상 공부를 안 했을 것이다. 자기가 너무나 힘들게 믿고 있는 신조를 벗어나는 진리를 수용할 용기가 없었거나, 이미 굳은 머리와 감성이 새로운 것을 감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 고통 속에 굳은살 베긴 그들의 감성을 탓할 생각은 없다. 단지, 느낄 수 없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알고라도 있을 일이고, 모른다면 말이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일이다. 꼭 글쓰는 일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밥먹고 사는 길은 많다. 자기가 여전히‘진보적인 일’에 종사한다는 만족감을 얻기위해 남들을 혼동시키고 괴롭혀도 좋다고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나는 티비를 보고 자라나 늘 주변에 깔린 대중음악을 듣고 사는 세대가 자신에겐 너무나 진부한 것에 반발해 새로운 감각들을 찾아나서서, 결국엔 바보같은 평론가의 말을 믿고 락이나, 인디영화나, 펑크나, 힙합, 혹은 테크노의 눈먼 노예가 되버리는 일을 바라지 않는다. 남들과 대립되는 자기의 취향은 물론 긴장 때문에 약간 딱딱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엉뚱한 설명서를 첨가해서, 자기의 자유로운 유영도, 남들의 즐거운 소풍도 가로막는 좀비가 되어버린다면, 그 잘난 취미를 애써 지켜서 무엇하리요 하는 생각이다.
예술과 비평의 목적
어디까지나 문화예술은 자기 확장과 쾌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혹시 자기가 생각은 급진적인데 몸이 안 따르거나, 전연 생각은 없는데 감각적으로 뛰어나다거나, 어떤 경우라도 그의 감각은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다. 아무리 말을 잘 해도, 진실한 자기의 느낌을 속이고 조작하는 한 그 사람의 말들은 쓰레기일 뿐이다. 자기의 모자란 점에 대해선, 솔직히 시인하면 그만이다. 우리들은 각자 다른 시스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하드를 최적화해 놓으면, 인생에 도움되는 얘기들을 얼마든지 주고 받을 수 있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기만에 대해선, 난 클리닉을 차릴 마음은 없다. 스스로 깨야할 뿐.
자기가 느낀 것으로 끊임없이 자기의 논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비평가가 될 수 있다. 말하기를 귀찮아하거나 몸으로 움직이는 걸 휠씬 좋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때가 없거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 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모두 예술가에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자기가 발견한 영역들이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르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이 많길 바란다. 많은 걸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의심없는 의견이며, 이를 위해서는 투명한 시스템을, 투철한 의심과 물음을 추구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제안.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즐기지 못한다면, 느끼지 못한다면 비평은 필요없다. 쓸데없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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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솔직성에 대해 겸손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 난 용량이 작아서 거짓말을 못하는데요?
고문서 1998.9 마지막 수정
비판분류